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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구원의 투구-하나님의 전신갑주(5)

현존하는 고대 로마 시대의 실제 투구. 머리와 얼굴의 다양한 부분들, 목 부위 등을 보호할 수 있게 제작됐다.  Source: Pinterest

 

구원의 투구
영적 싸움 도우미: 하나님의 전신갑주(5)

 

영적 싸움 도우미 시리즈의 일환으로, 신약성경 에페소서 6장 14-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신갑주(온몸갑옷/완전무장) 가운데 이번엔 제 5번째 무기/무장인 구원의 투구를 다루겠다.

 

[ 필자의 사견이다: 사족인지 모르나, 우리말 '투구'에는 한자어가 딱히 따로 없다. 鬪具나 投球, 는 다 아니다. 소리는 꼭 한자어 같은데, 한자가 없음에 놀란다. 전신갑주(全身甲胄)란 4자성어의 끝 자인 '주(胄)'는 투구를 뜻하는 한자어로, 글자 자체가 투구 모양이다(한자의 주체는 본래 갑골문자에서 온 실제 사물의 모양을 딴, 상형문자이다. 현대에도 쓰이는 상형문자는 한자뿐이다). 중국어에 투구를 뜻하는 두회(頭盔: 즉 머리에 쓰는 바리라는 뜻)가 있는데, 발음이 '토우퀘이'(또는 '토우퀴')다. 나의 추론은 이 발음이 이두(吏讀)화가 되어 우리말의 투구가 나왔다는 것이다. ]  

   
구원의 투구는 에페소서 6'17에 나타나 있다. 투구는 물론 중요한 방어 무기의 하나로, 머리를 보호하는 도구이다. 

"또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이하 성구들은 사역)

이 부분이 신약원어인 그리스어로는 이렇게 돼 있다. 

"...καὶ τὴν περικεφαλαίαν τοῦ σωτηρίου δέξασθε,..." 
(음역: 카이 텐 페리케퐐라이안 투 소테리우 덱사스테)

 

따라서 구원의 투구를 원어로 페리케퐐라이아 (테스) 소테리아(περικεφαλαία σωτηρία)라고 할 수 있다. 아다시피 투구를 영어로는 헬멭(helmet)이라고 부르며, 과거엔 주로 방어무장의 일부로서 철모 등 군사용으로 썼지만, 현대에는 건설용, 자전거용 등 다용도의 안전모 즉 머리 보호 도구로서, 헬멭이 매우 자주 사용된다. 현대 헬멭의 다양한 용도에 관하여 다음 괄호 속 링크를 참조하라( https://ko.wikipedia.org/wiki/헬멧 ). 물론 이 모든 헬멭의 원조는 고대 전쟁에 쓰인 투구였다. 

페리케퐐라이아(περικεφαλαία)는 '둘레-, 주변에, 감싸-'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 페리(περι)와, '머리'란 뜻인 케팔레(κεφαλή)의 결합어이다. 이 낱말이 신약 성경의 다른 성구에서도 사용됐다. 

다음을 보자. 

테살로니카A서(살전) 5'8
"...καὶ περικεφαλαίαν ἐλπίδα σωτηρίας·" (구원의 희망의 투구)

이에 대해서는 글 아래서 다시 한 번 더 다루겠다. 

 

코바 예슈아(!) 

흥미롭게도 '구원의 투구'는 구약 성경에 먼저 나타났다. 예샤야후(이사야)서 59'17에서인데, 사실 이 구절은 신약의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원형이다. 

"그 분은 의를 가슴판으로 걸치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시며, 응징을 속옷 삼아, 열심을 겉옷 삼아 입으십니다."(사역)   
וַיִּלְבַּ֤שׁ  צְדָקָה֙  כַּשִּׁרְיָ֔ן  וְכֹ֥ובַע  יְשׁוּעָ֖ה  בְּרֹאשֹׁ֑ו  וַיִּלְבַּ֞שׁ  בִּגְדֵ֤י  נָקָם֙  תִּלְבֹּ֔שֶׁת  וַיַּ֥עַט  כַּמְעִ֖יל  קִנְאָֽה׃
 (음역: 봐일바쉬 쩨다카 카쉬란 베코바 예슈아 베로쇼 봐일바쉬 비그데 나캄 틸보쉩 봐야아트 카미일 퀴나)

 

즉 파울의 전신갑주 계시는 본디 이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 이 구절에서 구원의 투구는 히브리어, '코바 예슈아'(וְכֹ֥ובַע יְשׁוּעָ֖ה)로 돼 있는데, 뒷 부분은 모쉐의 후계자 예슈아(예호슈아) 및 예수님의 히브리 명과 똑 같다! 이 부분을 예수님 이전의 유대인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인 70인경(the Septuagint, LXX)에선 정관사를 생략한 περικεφαλαίαν σωτηρίου로 옮겼다. 유대인들이 수시로 구원, 구원자와 같은 예수님의 이름 '예슈아'를 늘 듣고 부르면서도, 그 분이 참 구원자이심을 모르거나 끝끝내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한 이들이었다! ]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머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머리다. 한 사람을 대표하는 얼굴이 앞에 있기도 하지만, 눈과 귀와 코, 입 등 몸 전체의 작동에 없어선 안 될 필수적인 감관과 기능들이 모여있는 곳이 머리이다. 더욱이 입술과 혀 등과 합하여 말 소리를 내는 목청과 생명의 기본인 숨을 들이키고 내쉬며, 음식으로 이로 씹어 몸에 내려보내는 식도, 뇌의 모든 혈관들이 오가는 목줄기가 바로 머리 아래 달려있다. 그러니 머리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머리 속에는 두뇌가 자리잡고 있어, 몸의 다른 모든 부분을 관장하고 지시하는 관제탑/사령탑 내지 총사령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로, 뇌의 하내부에 위치한 아몬드 크기의 시상하부(視床下部, hypothalamus)는 몸 전체의 신경과 호르몬 분비, 체온 조절, 신진대사, 정서와 정신건강 등을 좌우하는 본부 구실을 한다. 특히 뇌는 정신/혼의 좌소로서 지/정/의, 특히 지능 활동을 펼치고 관장하면서도, 몸의 다른 부위들의 모든 활동을 통제한다. 또한 지혜와 지식/기억의 창고이기도 하다. 머리를 크게 다치거나 목이 분리되고 나면, 사람은 나머지 몸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즉사하게 된다. 따라서 이 머리를 덮고 감싸고 있으면서 보호하는 투구는 대단히 중요한 무장이다.        

왜 구원과 직결되나?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가 왜 구원과 연계될까? 머리가 몸에서 가장 귀하듯, 구원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이 구원과 구원의식, 구원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한다. 혹 내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잃는 한이더라도 구원만은 잃어선 안 된다.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이고, 그분의 자녀들이며, 천국 시민들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위치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신분과 상태를 지켜나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흔히 영화나 그림에서 보듯, 고대 로마 군인 특히 장교의 투구는 키보다 훨씬 더 높게 보이게 드높이 만들고, 그 위에다 닭이나 새의 볏 같고 공작의 머리 깃과도 같은 커다랗고 화려한 붉은 장식 술을 달기도 했다. 이것은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게도 하지만, 우선적으로 사람의 몸에서 머리의 존귀함을 시사해 준다. 


고대 로마 전쟁사에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 한 가지가 적의 전투용 도끼(battle-ax; 라틴어 securis acies=세쿠리스 아키에스/아체스)에 관한 것이다. 야만족은 흔히 자루가 짧은 이 도끼를 들고 상대방인 로마군의 팔, 다리 등을 마구 찍어낼 뿐더러 심지어 머리 위나 목까지 찍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로마 군 헬멭의 구조는 특별했다. 웬만한 도끼로 맞아도 끄떡없게 단단한 두상(頭相) 얼개에다 얼굴 좌우편과 목 부분까지 다 덮어, 쉽게 머리나 면상이 다치거나 목이 잘려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없게 했다. 물론 웬만한 화살도 투구를 쉽게 뚫을 수 없었다. 

크리스천의 구원의 투구도 마찬가지다. 구원의 확신이 떠나지 않게 이 헬멭을 단단히 붙들어 두어, 구원마저 잃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걸치고는 있지만, 자신도 믿음으로 노력하고 영적인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구원 그리고 끝?

어떤 이들은 일단 예수님을 믿어 한 번 구원을 "받아놓고" 나면, 그 다음은 자신이 아무 노력을 하지 않고 빈둥거려도, 절로 천국까지--마치 전설 속 신바드가 양탄자를 탄 것처럼 사뿐하게--일사천리로 날아 들어가는 줄 알고 있다. [솔직히 나도 그랬으면 편하겠다!] 이른 바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OSAS)'이라는 설이다. 절대주권설에 근거해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간과해 버린다. 

그런 이들에게 묻겠다. 그럼 구원받아 놓으면 그만이지, 교회는 왜 열심히 다니는가? 구원받아 놨으면 집에 가만히 편하게 누워 천국갈 때까지 노닥거리면 되지, 기도는 왜 맨날 하는가? 구원 받았으면 자동천국행인데, 회개는 왜 애써서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일단 구원받아 놓으면 가만 있어도 될 텐데, 선행은 왜 하는가? 헌금은 왜 하는가? 그럼, 자유의지가 무슨 소용이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성화적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발상대로라면, 논리적으로 성화 역시 '자동'이어야 하며, 인간 편의 성화를 추구한다면 인간의 노력이어서 '행위구원론'이 되고, 결국 '신인협력설'이 되니까, 그런 노력은 별로 필요치 않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자신의 선행과 노력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율법종교의 전형이며, 절대주권론보다 더 위험한 발상이다. 구원자는 예슈아, 곧 예수 크리스토님이시지, 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성화를 위한 노력을 전혀 경주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럼 사도 파울은 왜 끊임 없이 순간 순간 자신을 (영적/정신적으로) 채찍질하며 날마다 싸워야 했던가?! 왜 매일 죽노라고 했을까?! 그것도 인간적인 노력 아닌가? 아, 뭐, "자동으로" 구원받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인데도? 

 

성경의 답변

과연 인간은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럼 왜 사도 파울은 여러가지 하늘 상급과 금관('면류관')을 위하여 애써야 했던가? 왜 발버둥질쳐야 했나? 그것도 인간 편의 노력이 아닌가? 

왜 파울은 이런 말을 하는가?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한 나의 수고가 혹 허사였나 걱정됩니다."
(갈라티아서 4'11)

히브리서 기자는 왜 이렇게 말하는가?
"조심하시오, 형제님들! 여러분 가운데 혹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말입니다."(히브리서 3:12). 

특히, 페트로는 왜 이런 경고를 했을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으니, 악한 무리의 오류에 홀려, 확신을 놓치지 않게 조심하시오."(페트로A=벧전 3'17, 사역).

구원의 투구를 적당히 엉성하게 써서 헐렁하거나, 투구 끈을 매지 않아 덜렁거리는 바람에, 구원의 확신을 흘려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었다고 하여,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자동으로 유지된다는 생각은 짧은 생각이다. 우리는, 전신갑주를 늘 챙겨 입어야 하는 수고 외에도, 다양한 무기로 싸워 원수를 이겨내야 한다. 곧,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가슴판을 걸치고, 평화의 복음으로 준비된 군화를 신고, 믿음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매일 기도와 간구를 하고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 크리스토께서 앞장서서 이미 승리를 주셨으나, 그 승리를 내 것으로 나누기 위해서는 나도 내 편에서 싸울 내 몫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크리스토님의 군사인가?
그런 노력과 싸움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배치되니, 그 절대주권을 위해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가? 그런 방임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가?

우리는 가장 소중한 구원을 지키기 위해 굳건한 확신을 붙들고 지탱해야 한다. 너도 나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게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의 투구의 핵심이며 목적이다! 구원의 투구는 다른 모든 무기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이 아니며, 실제적이며, 선명한 개념의 무기이다. 

파울은 말한다. 
"여러분은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들을 점검하여 확증하시오! 예수 크리스토님이 여러분 속에 계심을 모르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실격자들입니다."(코린토B서=고후 13'5)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어온 것에 더욱 관심을 쏟아, 우리가 떠내려가 버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히ㅂ 2'1)

 

왜 '구원의 희망의 투구'인가?

사실상 같은 투구인데도, 파울은 테살로니카A서 5'8에서는 '구원의 희망의 투구'라고 했다. 희망은 언제나 미래와 직결된다. 보통, 과거나 현재의 것을 갖고 희망이라는 말을 적용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을 붙든다는 것은, 그리고 구원의 희망의 투구를 쓴다는 것은 현재(일차적/완료적 구원 및 구원의 확신)와 아울러 강한 미래성(구원의 희망 곧 미래적/궁극적/최종적 구원)을 가리킨다. 이 구원의 양면성 내지 이중 시제성을 잘 이해해야 좋다. 

 

끝으로, 거듭 말하지만, 구원의 투구도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모두 한데 합하여 협업과 총화를 이루어야지, 어느 것 하나가 빠지거나 적당히 해서도 안 된다. 마치 로마 군병의 모든 무기와 무장이 완전하고 든든히 구비된 완전무장이라야 담대히 전선에 나서듯, 크리스천 군사 개인도 진리와 의와 평화와 복음과 믿음과 구원의 확신과 말씀과 나머지 기타가 모두 모아지고 조화되어야 옳다. 그래야 온전한 승리를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