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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하나님의 전신갑주7-기도

 

하나님의 전신갑주7
-영적 무기로서의 기도

본 블로그에서는 영적 싸움에 관한 시리즈의 일부로서 에페소서 6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장기간에 걸쳐 논해 왔다. 여기서는, 전신갑주의 7번째, 곧 마지막 무기인 기도에 관해 논하련다. 

이 무기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한 우리의 본문의 일부인 엪 6장의, 18절에 소개되어 있다. 
시리즈 전회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기도도 엄연히 영적 무기인데 이에 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 기도와 간구 등도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포함된다는 적극적인 견해다. 필자 자신도 이 견해 쪽이다. 그럴 경우, 앞에서 거쳐온 전신갑주의 각 부분들 즉 진리의 허리띠, 의의 가슴판, 복음으로 준비된 평화(또는 평안)의 군화,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등 여섯 가지에 더하여, 모두 7가지가 된다. 7은 완전수다. 전신갑주((身甲胄, the Whole Armor of God)란 말이 완전성 개념을  포함하므로, 6보다는 7이 더 걸맞다고 생각된다. 

둘째로는, 문맥과 개념상 이 무기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주장이다. 여기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우선 언뜻 생각하기에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만큼, 하나님 자신은 기도의 대상이시기에 기도하지 않으시며, 기도할 필요도 없으시다는 발상 때문인 듯하다. 
또 사도 파울은 6가지의 다른 무기는 로마 군병 개인 무장의 각 부분으로 은유했어도, 기도는 그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인 듯도 하다. 하지만 기도를  파울이 직접 은유하진 않았어도, 다양한 유형의 기도들은 던지거나 찌르는 창, 활과 화살, 특히 합심기도의 경우, 규모가 더 큰 공성추(battering ram)나 투석기(catapulta) 등 좀 더 전술전략적인 무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도는 공격무기인 동시에 방어무기이기도 하다!  
아울러 기도에 관한 해당 성구(6'18~20)가 길게 이어지는 점도 이런 소극적인 견해에 한 몫한다. 

셋째로, 전신갑주에 속한 6가지 무기에 더하여(플러스) 단지 부수적, 간접적인 무기로서 기도를 포함시키는 견해이다.  

심지어 기도는 영적 무기가 아니라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기도로밖엔 쫓겨나지 않는 악령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찌 기도가 영적 무기가 아니겠는가?! (참고: 마르코스복음서=맑 9'17~29 특히, 28,29절 참조). 중요한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포함되든, 되지 않든, 분명히 치명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영적 무기라는 진리이다. 


이제 해당 구절을 다뤄보겠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개정역)

원문(그리스어):
διὰ πάσης προσευχῆς καὶ δεήσεως, προσευχόμενοι ἐν παντὶ καιρῷ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εἰς αὐτὸ ἀγρυπνοῦντες ἐν πάσῃ προσκαρτερήσει καὶ δεήσει περὶ πάντων τῶν ἁγίων,
음역:
디아 파세스 프로슈ㅋ헤스 카이 데에세오스, 프로슈ㅋㅎ메노이 엔 판티 카이로 엔 프뉴마티, 카이 에이스 아우토 아그뤼프눈테스 파세 프로스카르테레세이 카이 데에세이 페리 판톤 톤 하기온 

온갖 기도와 간구로써 언제나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시오. 늘 깨어서 힘써 구하면서,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시오.(사역)

구절이 복합적이지만 조금 풀어 헤쳐보면 금방 쉬워진다. 

온갖 기도와 간구?

먼저 '온갖 기도와 간구로써'라는 말은 한 마디로, 영적 싸움을 할 때 모든 타잎의 기도 형태를 총동원하라는 말씀과도 같다. 
영적 싸움엔 정말 그래야만 한다. 기도의 유형을 예로 들겠다:

기도: 평소의 기도를 포함한, 좀 일반적인 기도 형태일 것이다. 
간구: 함께 영적 싸움을 싸우거나 위기에 처한 남을 위한 도움기도 등 중요한 제목을 갖고 간절히, 줄기차게 매달려 아뢰기. 

명령 기도: 사탄과 그의 졸개 악령들을 예수 이름으로 꾸짖고 명령하여 그들을 굴복시키거나 내쫓는 강력한 권능적 기도. 

말씀 기도(=성구기도): 성경에서 특히 영적 싸움에 관한 성경구절(예: 시편 제 27, 91편; 엪 4'27; 6'11 등)에 자신이나 해당 대상의 대명사/이름 등을 대입하면서 선언/선포하는 기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의 말씀을 중시하시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기도이다! 영적 싸움에서는 위의 명령기도에 준한 형태의 성구 기도, 승리를 약속한 기도나 두려움을 떨치는 기도, 승리를 선포하는 기도 등이 걸맞다. 이를 위해 제때 제때 인용하며 기도할 적절한 성구를 나열한 노트를 만들거나 형광펜/색연필로 표시한 전용 성경책을 곁에 두는 것도 좋다. 

모범 기도 따르기: 아울러 성경 속에 게재된 다양한 신앙 선배들의 기도를 활용하면 좋다. 예: 모쉐의 기도, 야베즈의 기도, 슐로모의 기도, 다뷔드의 기도, 느헤미야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 예레미야의 기도, 주님의 기도, 사도 파울의 기도 등. [ 어떤 이들은 선진들의 기도가 어떻게 내 기도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데, 계시의 일부로서 수록된 기도를 영적으로 활용하면 좋다는 것이다. 사실 주님의 기도는 주님 자신의 기도이기보다 우리를 위한 모범기도이다. 다른 기도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영적 싸움에 적절하지 않은 기도도 있다. ]

영언으로 하는 기도

영언('방언기도'): 가장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이다. 어떤 이들은 영언('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들을 가치도 없는 어불성설이다! [이름만 신자이지, 성경대로 믿지 않는 사람도 역시 불신자에 속한다. 참고로, 마르코스복음서(=맑) 16'17,18은 맨 앞에 '믿는 이들에게는'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즉 믿음이 전제 조건이란 뜻이다. 안 믿는, 또는 못 믿는 이들이 아닌, 믿는(!) 그들에게 영언을 비롯한 여러 표징들이 따른다고 주님이 몸소 약속하신 예언이다. 신자로되, 이 표징들이 따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믿는 이'들은 그냥 교회에 다니는 일반 교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믿지 않으면 이 약속대로 표징들이 따르지 않는 말과도 같다. 믿지 않거나, 안 믿어지거나, 못 믿는데도 저절로 따라주진 않는 법이다.] 

한글 개역은 해당 구절 부분을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로 옮겼다. 무시로라는 말은 '때를 가리지 않고 항상'이라는 정도의 의미이겠다. 사실 이 대목은 '모든 경우에'로도 풀이된다. 이 기도에 가장 잘 맞아드는 것이 바로 영언이다. 다른 모든 기도들은 계속 집중하여 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영언의 경우는 내 정신으로는 의식하지 않아도/못해도 입으로는 중얼중얼 기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사실 모든 기도들 가운데 영언의 가장 편리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자다가도 지구촌의 이름모를 그 누군가를 위하여 중얼중얼 영언을 하다 잠을 깨는 경우가 성령 충만한(=성령 채우심을 받은) 신자들에게 흔하다. 물론 이것을 안 믿는, 또는 이것이 도저히 안 믿어지는 교인들은 이마저도 비웃을 법하지만.  

영언의 기능은 다양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의 기능이다(코린토A서 14'14). 또 코A 14'2을 보면, 영언은 하나님께만 통하는 비밀통신과 같은 것으로, 내 속의 깊은 비밀을 아뢰는 도구이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가 아닐 수 있는가?! 그리고 파울이 말한 영적 기도와 영적 노래는 모두 영언을 통한 것이다(코A 14'14,15; 에페소서 5'19; 콜로새 3'16). 후자를 '방언찬송'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는 영으로 하는 영적인 기도 곧 영언기도와, 혼으로 하는 혼적 기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흔히 모국어 또는 자신이 아는 제2, 제3의 언어로 하는 기도가 후자이다. 그러나 혼적 기도를 '영언'이라고 하진 않는다. 

영언은 영적 싸움에서 필수 불가결의 기도이다! 사례를 들자. 고속도로에서 달릴 때면 으레 영언으로 기도하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연쇄충돌 사고 같은 경우, 미리 도우심을 입는 때가 드물지 않다. 
여성 부흥강사인 S 목사는 북미주의 어느 한인교회에서 밤 집회를 이끈 뒤 차를 타러 가는 사이, 술 취한 두 괴한이 나타나 양쪽에서 팔짱을 끼는 바람에 너무나 놀랐으나 즉시 영언을 시작했다. 그러자 괴한들은 갑자기 온몸이 경직된 채 그 자리에 서버리고, 그 목사는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물론 신자들 가운데도 영언에 대한 성경의 약속과 힘을 믿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무슨 마술이냐?"고 코웃음치며 우습게(?) 여기겠지만, 이를 믿는 신자들에겐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오직 말씀대로 믿는 사람에게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연약한 남을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이런 혜택이 따른다. [ 반면, 믿지 않을 경우, 이 혜택을 걸러가며--어찌 보면 부분적 신자 겸 부분적 비신자로서--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고 부분적 불행을 맛보며 살게 된다. 결국은 하늘나라 가기까지 자기 손해다(이 점을 필자는 장담한다!). 하늘나라는 (신학을 알면서도 믿는 자가 채 못 된) 신학자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오직 믿는 자들을 위한 곳이다! 영언의 다른 기능들도 있으나, 여기서는 영적 싸움의 도구로서의 면모만 살펴 봤다.] 

늘 깨어서, 줄기차게 

이제 우리의 본문인 이 구절의 뒷 부분에서, 사도 파울은 늘 깨어서, 힘써(애써) 줄기차게 기도하면서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서도 간구를 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파울은 딴 서신서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시오"라는 권면도 했다(테살로니카A서 5'17).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할 듯 싶은데, 성령님 안에서 가능하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것을 가능케 하려고 애쓰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스스로 인간의 힘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사도 파울은 코린토교회의 모든 성도들보다 더 영언을 말한다고 했는데(코A 14'18), 이것은 아마도 그가 잠시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하루 종일 영언을 하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갖고 사도 파울이 여러 언어를 말할 수 있었던 어학적 능력이라고 주장함은 완전 넌센스다! 영언은 한 마디로 영적 언어이지, 바벨 탑에서 흩어진 세상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체험은 거의 전혀 없으면서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영적 지식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그런 사람은 소위 시세이셔니스트(cessationist : 중단론자)이기가 쉽다. 하지만 그들은 중단론자여도, 성령님은 중단론자가 아니시다! 그 분은 어제와 오늘, 언제나 한결같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첫 성도들에게만 좋은 것을 맛보여 주시고, 후대의 성도들에겐 '오리발'을 내미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난 믿고 싶지 않다! ]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마치 낮으로 밤으로 보초를 서는 보초병이나 초병, 파수병이나 경비병, 앞서 탐지하는 첨병들처럼 영적으로 늘 깨어 경성하며 영적인 주위를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는 또 인내하며 끈질기고 줄기차야 바람직하다. 기도하다 이내 제 풀에 지쳐 버린다면, 믿음의 기도일 수가 없다. 상대인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지치지 않고 강력/강렬하게 응답되기까지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영혼의 닻이신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특히 영적 싸움은 더군다나 그렇다. 

도움 기도와 합심기도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간구를 흔히 '중보기도'라고들 하는데, 비성경적인 용어이다. 옛 용어로는 도고(禱告)라고 했는데, '도움기도'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 왜냐하면, 하늘 땅 사이에 중보자라곤 유일한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신 예수 크리스토님 밖엔 없기 때문이다. 카톨맄 신부나 목회자도 주님 대신 중보를 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나 천사들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천주교 사제들이 받는 고백성사나, 천주교 신도들이 마리아나 성인, 천사 등에게 중보를 요청하는 기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주님의 단독적 사역을 강제로 앗아가려는 기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지난 십 몇 세기 동안에도 여전히 이 진리를 무시하고 있다.  

성도들 서로를 위한 도움기도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중요하며,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기도이기에 가장 귀하고 바람직한 기도이기도 하다. 또 하늘나라 상급도 크다. 그런데 영적 싸움에서는 동료 전사인 성도끼리 함께 연합하여 하는 기도가 특히 중요하다. 합심기도, 연합기도 또는 '기도합창' 또는 '기도 콘서트(신사도권에서도 쓰이는 말인데, 용어 자체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도 하는데, 영적 싸움에서 이런 기도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마치 전우들이 구호나 군가를 부르면서 기개를 북돋듯 서로 힘을 합하노라면 그만큼 더 힘과 용기가 솟기 때문이다. 
주님께선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마 약속하셨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이에 더하여, 사역자를 위한 도움기도 특히 말씀 사역 전선에 나선 주님의 종들(우리 모두 주님의 종들이다)을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파울은 이 점을 이어진 본문 엪 6'19'20에서 강조하고 있다.  


금식 기도

비록 사도 파울이 꼭 집어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온갖 기도와 간구엔 당연히 금식기도도 포함된다고 본다. 기도엔 으레 금식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금식이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얼마나 강조됐는지는 성구 검색을 해 보면 안다. 주님께서는 수시로 금식하셨겠지만, 생애에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서 특히 금식하셨을 법하다. 공사역을 하시기 전, 광야에서의 금식(이 금식 후 유혹하는 마귀를 말씀으로 물리치셨다!)기도도 그러했다. 사도 파울도, 자신의 팀이 선교하여 세운 각 교회의 장로를 세우기 전, 금식기도를 했다. 이처럼 영적 싸움에서도 금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율법적 또는 금욕적으로 할 게 아니라, 성령님의 뜻을 따라 슬기롭게, 융통성 있게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나, 금식 중이에요" 식으로 드러내어 자랑하며 나대는 것은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금식은 오직 은밀하게 하는 경우다(마태복음서 6'16~18). 
구약 성경 예샤야후(이사야)서 58장 특히 58'6~11에서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몸소 알려주고 계신다. 영적 싸움을 통해 성도가 해방되고 온전해지는 것은 참된 금식의 일부이다! 그만큼 영적 싸움은 중요하다.  


이상으로, 성경이 그려주는 영적 싸움의 무기의 최중심이자 핵심인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시리즈 수 회에 걸쳐 다루었다. 
다음 회에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종합하여 결론적인 글을 곁들이고, 그 이후로도 영적 싸움에 관한 다른 얘기들과 실화들을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 이 이슈에 관한 독자들의 계속적인 관심과 질문 등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