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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등풀의 생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 (들풀)



이 글은 제가 학교 수업 시간에 기말 페이퍼로 제출한 것을 좀 수정해서 올린 것입니다. 그리 깊이 있는 연구는 아니고요. 개론 차원에서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올립니다. 조금 길지만, 지겹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네요.^^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혹시 각주가 있는 전체를 원하시면, 티엘티로 이멜을 보내 주세요.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하나님의 형상이란
 
A. 언어적 고찰
 B. 기독교사적 흐름

3. 하나님의 형상과 구원론
A.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B. 동방정교회의 구원론: 신화(Deification, Theosis)

4.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신학
A. 로마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논쟁
B.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

5.  현대 개혁주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6.  맺는 말

 

사람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기독교를 위시하여 다른 모든 고등종교 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또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는 사람의 존재의 근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기독교 신학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의 형상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하고, 또한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 보고, ‘하나님의 형상을 근거로 한 인간론이 기독교 신학의 다른 부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 본다.


 
   1.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기사는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 처음에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빛을 만드셨고, 둘째 날에 궁창들을 만드시어 물들을 분리하셨고, 셋째 날에 하늘 아래의 물을 모으시어 땅이 드러나게 하시고 나무를 비롯한 온갖 식물을 만드셨고, 넷째 날에 하늘에 광체들을 만드셨으며, 다섯째 날에 온갖 날짐승과 물고기를 만드셨고, 여섯째 날에 땅에 온갖 동물을 만드셨고 맨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으며,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는, 다른 창조물과는 다르게, 먼저 사람을 어떻게 만드실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시는 설명이 나온다. 창세기 1:26~27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으므로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 기록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통해서 고찰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고찰함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와 사람의 타락은 이 형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죄성의 사람의 형상에 어떤 결과가 주어졌는가? 이다. (본고에서는 처음 두 개의 질문을 중점적으로 고찰하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고찰하는 것은 사람의 창조와 타락, 죄와 구원, 그리고 우리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 및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고찰에 광범위하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데, 자브리스키는 말하기를, “신학의 역사상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리는 언제나 동시대적인 신학의 흐름 속에서 더 도전적인 목회적 상관성이나 더 자극적인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리고 이 교리와 관계되는 다른 교리들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 보는 것은 사람의 존재의 근원을 고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살펴 보는 기회가 된다.

 

2.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창 1:26~27 뿐만 아니라 창 5:1~3, 9:6~7, 3:9, 고전 11:7 말씀이 증거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전 시대에 걸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논의는 상기한 세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는 먼저 언어적으로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는 것이었고 또한 신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A. 
언어적 고찰

형상과 모양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는 원어 단어가 첼렘(
צַלְמֵ)과 데무트(דְמוּתֵ)이다. 그리고 히브리 원문에는 첼렘과 데무트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으나 칠십인역과 라틴 불가타역에 ‘and’에 해당하는 단어를 넣어서 번역함으로써 첼렘과 데무트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은 각각의 고유한 언어적 특징 때문이며, ‘and’를 넣었다고 해서 첼렘과 데무트가 반드시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첼렘은 새기다(to carv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부터 유래되었기에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데무트는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모양이란 말은 형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첼렘이란 말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은 원형이시고 인간은 그 모형이라는 사실이고, 데무트란 말은 그 상()이 모든 면에서 원형과 일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병행법적 용례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념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또한 첼렘과 데무트와 함께 사용된 전치사를 살펴봄으로써 첼렘과 데무트의 의미를 나누려 했던 시도들이 있었으나 이 단어들과 함께 사용된 전치사들이 상호 교환적이었기에 전치사를 통해서 그 의미를 구분하려 했던 시도들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형상 또는 신()의 형상에 대한 문화 및 종교적 사례를 살펴보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을 신의 형상으로서 묘사하였다. 특히 이집트 문헌의 경우에는, ‘신 형상이 신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어떤 특권 또는 신의 속성을 가리키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신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형상의 원래 목적은 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최초의 장소를 나타내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의 중요성은 기술된 방법이나 신에 대한 묘사에 있지 않고, 그 자신을 드러냈던 상()에 있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와 축복은 형상을 통해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형상의 중요성이며, 이는 구성된 형식보다 상의 기능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고대 근동에서는 군주들이 한 지역에서 자신의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자신의 형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살펴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란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 소유이거나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기독교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형상을 살펴보면 루터 이전까지는 첼렘과 데무트를 서로 다른 의미로 구분하여 대부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어떤 속성이나 본질로 이해해 왔으나, 루터는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를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단순한 반복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서, 형상과 모양을 서로 다른 것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루터 이전이나 이후에 모두 형상에 대해 여러가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였다.

스탬(J. J. Stamm)형상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검토하고서 1940년을 기점으로 해석이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그 이전에는 형상(첼렘)에 대하여 4 가지의 그룹이 있었다: 1) 형상은 사람의 영적 자질: 자의식, 자기결정, 능력, 영원과 진리와 선에 대한 이해, 이성, 개성, 태생적 고귀함, 2) 자연에 대한 통치, 3) 하나님과 사람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개념, 4) 하나님과 비슷한 사람의 모양. 그러나 1940년 이후로는 스탬의 분석에 따르면, 궁켈(Gunkel)은 형상이 외형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험버트(P. Humbert)는 창 1:26 말씀의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어구가 사람은 신성과 동일한 물리적 형태로 창조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쾰러(L. Koehler)는 다른 셈족 언어들에서 사용된 첼렘을 검토하여 비슷하게 생각하였는데, 첼렘은 우선적으로 직립 형태이고 하나님의 형상(첼렘)은 사람의 직립 자세, 좀 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첼렘에 따르는 사람의 창조, 즉 형태의 의미에서의 그분의 형상에서 우선적으로 보여진다고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일부 학자들은 사람의 물리적 특성이 형상의 어느 부분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로울리(H. H. Rowley)는 구약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물리적 형태를 전혀 갖지 않으시는 분으로 인식되었다고 하였고, 덩커(P. G. Duncker)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과 육체적으로 비슷하게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양성(bisexual)적이신 분이어야 한다며 하나님의 초월성은 이러한 것을 제외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공유하는 어떤 특질이라고 다시 정의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에도 여전히 형상모양을 각각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 사이에 통일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말씀에 명확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말씀 전체를 살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는 말씀들을 토대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해석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인간론, 은총론, 구원론, 기독론 등을 검토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이해가 올바른지 확인할 수는 있다.

 

B.  기독교사적 흐름

밀라드 에릭슨은 그의 조직신학 저서인 <복음주의 조직신학>의 인간론에서 현재까지 논의되어 온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를 세 가지, 실재론적 견해, 관계적 견해, 그리고 기능적 견해로 구분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실재론적인 견해가 가장 먼저 나타났고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점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실재론적 견해는 다시 넓은 의미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 나누어져서 아담의 타락 후에 아담으로부터 상실된 형상과 여전히 아담에게 남아 있는 형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먼저 초대교회 시기에 교부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 보면, 초대교회의 거의 모든 기독교 사상가들은 실재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속성인 이성, 도덕성, 인격성, 자율성, 영혼 불멸성 등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클레멘스와 오리겐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여하한 신체적 특성을 거부하면서 인간 영혼에서 그것을 발견하고자 하였고 모양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자질로서 계발되기도 하고 상실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은사로 보았고, 하나님의 모양은 초자연적인 은사로 보았으며, 애초의 창조시에 불완전하게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까지 성장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또한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를 잃어버렸으나 자연적인 은사는 그대로 남아있으며, 그 잃어버린 초자연적 은사는 중생 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터툴리안 역시 하나님의 형상(imago, εικων)과 모양(similitude, ομοιωσις)을 구분하여 형상을 신체적 특성으로, 모양을 영적 혹은 성품의 특성, 곧 영혼 혹은 이성으로 보았다. 그는 이것을 다시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여, 형상은 인간의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이해하고, 모양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이해하였다.  또한 아타나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은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별하고 형상과 모양을 이중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형상은 덕을 목표로 한 이성 속에 주어졌으나, 모양은 성령의 은사로서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반면에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닛사의 그레고리 등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별로 구별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최초로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의()’라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개념으로 새롭게 이해하였으며, 그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적 의(justitia originalis, 源義)’를 가지고 있었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적 의를 상실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마음 안에 기억, 이해, 의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으로 보았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를 중심으로 한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에게 부여된 통치적 또는 주권적 능력이라고 보았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에 반대하여, 만일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인간 본성의 무조건적인 자유 의지와 책임이라는 관념으로 인간론을 이끌어 갔다. 그에 의하면 인간 본성의 능력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능력, 의지작용, 그리고 행동이다. 의지와 행동은 인간에만 관련된 것이고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며, 하나님은 오직 능력에만 관계한다고 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중세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의 관점들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강력하게 계속 지지하였으나 그는 인간의 이성을 더 강조하였고, 스코투스는 인간의 의지를 더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러한 관점들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루터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전인적 인간 이해였다. 루터는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한 상대자로서의 자신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적 인간 이해이다. 루터의 이러한 전인적 인간 이해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본 회퍼는 자신의 논문 성도의 교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격 그리고 공동체 개념은 본래상태, , 그리고 화해의 개념을 통하여서 자세히 설명된다. 인격과 공동체 개념 모두,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변증법 안에서만 극복되어질 수 있다.” 루터는 또한 아담의 타락을 어거스틴이 정의한 본래적 의의 완전한 상실로 보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론을 살펴보면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실재론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이웃에 관계하는 사회적 존재로 보는 관계적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실체라는 관점에서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 관점에서 우주 만물, 성경말씀,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으로 한 칼빈의 인간론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그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여 왔다. 어느 학자는 칼빈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기도 하였고, 또 다른 학자는 기독론과 성령론을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인가 아니면 영혼의 기능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이에 대해 여러 시각으로 말해서 때로는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오시안더가 하나님의 형상을 몸과 영혼까지 확대해서 해석한 것을 칼빈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혼을 구별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몸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거나 영혼 그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의 어떤 자연적인 요소가 아니라 어거스틴이 말하는 본래적 의, 곧 원의인 거룩, , 지식과 긴리 속에서 영적인 반영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또한 아담이라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기에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이 구별되지 않는다고 암시하였다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타락과 함께 설명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 형상과 초자연적 형상으로 또는 좁은 의미의 형상과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두 가지의 형상으로 나누어서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자연적 형상은 부패되어 무서우리만치 변형된 채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한 칼빈은 천사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였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고의 완전성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의 이 주장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현대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몸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자연과 정신에 대한 진화론적 사상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우주 중심적이고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일부에서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편, 기독교 진영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해석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웨슬리는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의 형태, 즉 본질적 형상, 도덕적 형상, 그리고 정치적 형상으로 구분하였다.

 

3.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구원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구원론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논쟁 중 하나인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을 살펴보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동방교회의 구원론을 어떻게 달라지도록 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A.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기독교 초기에 있었던 대표적인 논쟁 중에 하나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벌였던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은총론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 특성 상 구원론 및 예정론에 대한 논쟁도 포함되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가 논쟁을 벌인 그 핵심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놓여 있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들의 신학이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우선 어거스틴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이었다. 어거스틴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적인 인간론을 주장하였으니, 그는 요 1:16 말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말씀의 기초에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결국 가장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인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어거스틴은 명확하게 증거하였다.

어거스틴이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아담의 타락 후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적으로 부패한 것으로 보았기에, 인간은 절대로 선을 행할 수 없고, 또한 인간에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소망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을 더욱 더 알면 알수록 인간의 무능과 초라함은 드러나게 되어 더욱 은총을 의지하게 된다고 하였다.

반면에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인간 중심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기가 있는가? 우리는 언제든지 선이나 악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으며, 이 자유로운 선택의 기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생득한 최고의 선이다.”고 언급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신학의 형태로 나아갔다.

펠라기우스도 하나님의 은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동방교회의 전통의 영향으로 인해서 은총의 자리에 본성과 자유의지를 놓고, 법이나 교육으로 대체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죄에 의한 인간 본성의 타락과 부패를 부인하였기에, 인간이 죄없이 살 수 있으며, 인간 본성은 죄에 의해 변화되거나 약화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인간 본성은 선을 행할 수 있다. 다만 본성의 세 가지 기능 중에 능력은 너무 약해서 하나님이 주어야 하지만, 의지와 행동은 인간 의지의 샘에서 흘로 나와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만 그 책임은 크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부과하셨은 즉, 인간은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하였고, 또한 인간이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명확한 은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인간은 그 자유를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선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고, 의로울 수 있다는 인간론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은총을 인간 본성과 의지에 도움을 주는 힘으로 묘사하였다. 인간 본성은 죄로 인해서도 전혀 부패하지 않았고 전혀 허물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죄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는 신앙의 모범으로 신자가 살아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부정하고 인간의 책임과 행동만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인 신학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정통적인 교회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이나 펠라기우스의 은총론은 인간론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이유가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필연성 때문인 것이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은총론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은총론이 구원론으로 확장되고 구원의 방법을 논하는 예정론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잘못된 인간론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은총론으로 나아갔고 그것은 또한 잘못된 구원론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주후 431년에 에베소 총회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B.   동방교회의 인간의 신화(神化, Theosis, Deification)’

현재에는 그리스 정교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의 구원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간의 신화(Theosis, Deification)라고 할 수 있다. 신화(神化)는 정교회를 특징짓는 요소이며, 정교회 신학의 전체 구조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요한 정교회 신학자들은 이 교리를 중심으로 해서 전체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정교회에서 신화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며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속사도들에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신화의 개념은 이그나티우스 및 저스틴을 그 시작으로 본다. 저스틴은 시편 82:6~7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진정으로 신들이라고 불리워질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의 개념은 이레니우스에게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는 신화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을 남겼다. 그 역시 저스틴처럼 시편 82편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신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간들이었고 결국에는 신들이 된다고 하였으며, 또한 만일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하였다. 그 후에 아타나시우스가 4세기에 이레니우스의 말을 거의 비슷하게 반복했으며, 바질은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 외에 다름 아니다고 했고, 닛사의 그레고리는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본성에 연합시키셨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인해 신화되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교부들의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정교회는 인간의 신화 교리를 구원론과 모든 정교회 교리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리스 교부들 그리고 신앙적 경험을 중요시 했던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인간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 위에 기반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른 인간의 창조, 둘째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성육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할 수 있는 힘이다. 이 세 가지 전제는 인간의 신화의 인간론적, 기독론적, 그리고 삼위일체적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다.

세 가지 전제의 그 첫번째인 인간론에 대해서는 이레니우스에게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간 이해,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 교부들은 형상과 모양을 구분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형상은 이성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양은 덕을 통해 하나님과 닮아감으로 보았다. 또한 형상은 창조 시부터 부여받은 능력이지만, 모양은 처음부터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목표로 삼아야 하고 점진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형상은 죄에 의해서 상실되지 않지만 모양은 죄로 인해서 파괴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모양을 다시 획득할 때 신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동방교회의 교부들은 신화를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모양’ – 또는 닮음으로의 움직임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의지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하여 신화되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협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동방교회가 신화의 개념에 따라서 구축한 구원론을 간단하게 살펴 보면, 동방교회는 구원을 영혼의 치유 개념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유전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인간의 순수지성이 무감각하게 되어 전 본성이 병들게 되었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의학적인 의미이다. 그리서 막시무스는 그 결과로 거짓된 지식을 갖게 되며,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된다. 그리고 정욕적인 생각에 빠지며, 죄에 동의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고 치유되기 위해서는 순수지성과 마음이 정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동방교회의 이러한 인간의 신화개념은 그 개념 자체 보다는 오히려 그 개념이 기술되고 있는 문맥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의 신화를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문맥에서 이해하지 아니하고 개방되거나 이방종교적 문맥이나 신비주의적 문맥에서 이해하면 속사도들이나 초대 교부들이 말하고자 했던 인간의 신화가 아니다.

심지어 성경적기독교적 문맥에서 인간의 신화를 이해할지라도 칭의와 성화, 전인적 인간의 중생 후 현재의 상태와 장차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영화로운 상태, 그리고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하나님의 성품에의 참여 등을 혼동한다면 인간의 신화는 기독교적 문맥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되며, 일단 벗어나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초대 교부들 사이에서 인간의 신화에 대한 거부나 반대의 견해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이것을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문맥에서만 이해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 역사상 처음의 일곱 공의회들에서 인간의 신화에 대한 어떠한 토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신화(잘못되었다는 관점으로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도 있고, 또는 토의할 만큼 어떤 확실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화교리는 4세기 이후에야 동방교부들 사이에서 구원론의 핵심으로서 정립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현재의 동방교회가 인간의 신화를 초대교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닌지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우선적으로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문맥에서 인간의 신화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4.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신학

A.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논쟁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도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고 있었다. 형상은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모양은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구분하였다. 자연적인 형상은 인간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은 인간 본래의 것,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연적인 은사들로 주신 것으로 영혼의 영성, 인간의 이성, 의지의 자유, 육체의 불멸성 등이며, 초자연적인 형상인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 의를 뜻하였으며, 아담의 타락 후에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만이 인간 본성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속하는 본질적 특성이므로, 원죄로 인한 타락으로도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형상개념, 즉 영혼의 삼중성인 기억, 지성 및 의지가 인간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계속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의 형상개념을 재해석하여, 이성적 동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이며 또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형상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전자는 인간이 그의 이성과 정신 속에서 하나님을 반영하는 의미에서 창조의 형상이고, 후자는 새 창조의 형상 또는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이라고 보았으며, 아담의 타락 후에도 자연적 형상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순수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나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논증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적 논증인데, 이것은 자연 세계를 관찰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와 같이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본래 창조된 대로의 인간은 본래적 의가 없었으나 또한 죄도 없었고 다만 죄의 결과를 낳기 쉬운 경향을 가진 것 뿐이었는데 타락 후에 인간은 본래적 의가 상실되었을 뿐이어서 타락했어도 창조된 때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로마 교회의 인간 이해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고급한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부여하셨으나 동시에 육체적 요소로 인해 저급한 세력들(inferiors vires)이 공존하여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supernaturalis donum gratiae)’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 선물은 아담의 타락 시에 상실되었고 구원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인간을 본질적인 것과 추가적인 것, 즉 자연과 은총으로 분리하여 인간의 전적타락 또는 전적부패와 무능을 부정하는 자연신학의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성이나 양심 자체는 구속 없이도 정상적으로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동한다는 자연신학을 주장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자연신학을 철저히 배격하였는데,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로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부패와 무능이 깔려 있다.
 

B.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

19 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다시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했던 대표적인 신학자들이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이다. 위기의 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의 신학은 신정통주의라고 불리우며, 실존주의적 철학과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관계의 개념에서 이해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인간 이해는 단순히 인간의 현상을 다루는 것이지 실제적인 인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독론적으로 인간 창조와의 상관 관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계약이라는 관계 개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대한 바르트의 주석적 이해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는 남성과 여성, 이 양성의 유비에서 창조주와 -의 관계에 있다. -여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기초 원리가 된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원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모형으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바로 이 원형과 모형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의 관계와 구별이다. -의 관계는 하나님 자신의 본질 속에 있는 원형(archtype)’,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본질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홀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 가운데 서로 교제하고 계신 하나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교제가 하나님의 삶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이고 사랑받는 자이고 영원한 사랑이시다. 바로 이 삼위일체성 속에 모든 나-너 관계의 원형과 샘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의 유비이고,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의 유비로 보았다.

바르트는 이 관계의 유비개념을 본회퍼에게서 받아들였다. 본회퍼는 그의 창조와 타락에서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해석함에 있어 처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유비로서 관계의 유비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하나님의 형상에 비유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관계의 유비 개념을 발전시켜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라고 보았고 이에 근거하여 계약신학을 이끌어 냈다.

한편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인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 즉 사랑에서 생겨나서 사랑에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여,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로 보았다. 여기에서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보고 있음이 엿보인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formal) 형상과 실질적(material) 형상으로 구별한다. 그리고 형식적 형상 가운데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피조된 존재임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인 타락을 통하여 실질적 형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브룬너에게 있어서 형식적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하나의 보편적인 접촉점이고, 이 형식적 형상을 통하여 인간은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고, 이러한 인식에서 인간은 역사 안에서의 책임적인 삶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브룬너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인간론의 틀 안에서 인간의 형식적 형상, 혹은 자연신학의 영역 안에서의 창조질서인 것이다. 이 형식적 형상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의 인식능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타락 후의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유한한 죄인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능력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자연능력을 묻는 것이다. 이것을 접촉점이라 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브룬너는 형식적 형상이 타락 후의 인간에게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고 함으로써 모든 자연적 인간의 능력 속에 하나님을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1934 년부터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이 시작되었다. 바르트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고 파괴되었으며, 이 파괴는 예외없이 인간의 존재 전체에 미쳤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있어서 접촉점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그 어떤 접촉점도 필요하지 않으며 친히 접촉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인간 예수가 계시며 바로 그분만이 진정한 접촉점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브룬너의 자연신학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브룬너는 바르트와의 논쟁에 있어서, 자연신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교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방법론적인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또한 인간이 자연 가운데 계시된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적인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나,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자연신학의 실재 뿐만 아니라 가능성까지도 거부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계시를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자연신학을 강하게 거부했던 바르트는 일반계시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일반계시를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5.    현대 개혁주의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A.    바빙크, 벌콮 및 베르까우어

종교개혁자들을 이어서 개혁주의 토대에 서 있는 바빙크는 인간론에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따라서 바빙크도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형상으로 이해하고 아담의 타락 후에는 좁은 의미의 형상은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의 형상만이 인간에게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빙크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인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해하였고,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제외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바빙크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인간을 천사와 구별되는 존재로 보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종족(geslacht)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바빙크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성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낱말로 표시되어 있으며,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으며, 셋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함과 동시에 목적을 가지셔서 문화명령을 주셨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사람인 아담의 무죄한 상태에 대해 기술하기를, 아담은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창조되었다고 함으로써 혹자들의 주장인 진리와 거짓 또는 선과 악의 중립적인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첫 사람 아담을 지나치게 영화로운 존재로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였지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고, 부패될 수 없고 영생을 아직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그 존속에 어떤 조건의 성취에 달려 있었던 과도기적인 불멸성을 받았다. 아담은 타락의 가능성을 안고 창조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벌콮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개혁주의 안에 있는 다양한 견해를 간단하게 소개한 후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요소는 a) 인간의 영 또는 혼, 즉 단순성ㆍ영성ㆍ불가시성ㆍ불멸성과 같은 자질들, b) 합리적인 인간의 신체적인 힘과 기능들, 즉 다양한 기능을 갖춘 지성과 의지, c)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 본성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순전성, d) 물질적 실체로서가 아닌, 불멸성을 공유하는 영혼의 적절한 기관으로서, 동시에 하급 피조물을 지배하는 도구로서의 인간의 몸, e)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 등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단연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하였고,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된 것은 형상의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하였다.

바르트 이후의 신학자인 베르까우어는, 신약 및 구약성경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론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존재의 유비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들 일부 초대교회 교부들, 로마 카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등 을 거부한다. 여기에는 창 1:26~27 말씀의 형상모양을 구별하여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다. 그는 형상모양을 히브리어 문법 상의 중첩어로 파악하였다.

베르까우어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이해에 대해서는 계승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하고 있는데, 1:27 말씀에 대한 주석 상의 문제와 남녀 관계성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함에 대한 비판이다. 베르까우어는 바르트가 이해한 대로의 관계의 유비를 수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관계성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으로 파악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구원의 실재성 속에 있는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떨 수 없는 인간의 관계성과 의존성 속에서 살아가는 실존적이며 전인적인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것에만 국한시킨다든지 아니면 육체적인 것들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영성과 육체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전인에 관계시킨다.

베르까우어는 관계의 유비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이다. 이외에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때 참되고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베르까우어가 이해한 성경적 인간은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현실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베르까우어는 전적 타락과 전적 타락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잔재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는 잔재물을 타락한 인간 속에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어떤 보존물이 아니라, 죄의 부패의 힘에도 불구하고 이탈될 수 없는 부분,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인간도 역시 인간이며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부여된 재능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는 잔재물을 인간의 어떤 영적 속성 또는 능력의 일부분과 같은 존재론적 특질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외 속에서도 전인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브룬너의 형식적 형상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형상의 이중적 국면을 드러내는데, 넓은 의미의 형상은 타락한 인간, 즉 자연인에게도 남아 있는 인간의 인간성이기에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인 것이며, 또한 좁은 의미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과제이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호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적이며 기능적인 면과 관계적인 면으로 구분하기도 하였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살펴 보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전인적이며 관계의 유비로 보았을 때의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즉 사람을 어떠한 존재로 창조하실지 그 존재의 속성과 능력과 자질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그 원형과 모형의 관계를 갖도록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그대로 사람에게 심어주어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로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또한 그 사랑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에게로 심어주시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계가 존재에 선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격적 관계는 인격적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관계의 유비존재의 유비를 어느 정도 함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의 유비관계의 유비안에서 상고하지 않고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뒤틀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존재의 유비로 간주하는 일체의 설명을 모두 거부한다. 반틸이 지적했던 것처럼 존재의 유비는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할 수 있다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창 1:26~27 말씀의 형상모양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전인적이며 관계의 유비로서 이해하여 인간론을 전개한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기독교적 인간론의 핵심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가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여러가지 신학적인 차이를 발생시키는지 예를 들어 살펴 보았다.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거의 대부분 실재론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 왔으나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러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어 현대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영과 육의 통일체로서의 전인적인 인간이며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데엔 커다란 어려움과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약 및 구약 성경 모두 인간론의 핵심에 하나님의 형상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인간론 뿐만 아니라 구원론과 기독론, 심지어 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견해를 확립할 수 있고 또한 확인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비록 시대적 환경이나 기독교적 이해가 성숙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 ‘하나님의 형상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기독교에 해악을 끼친 사례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 예로서 펠라기우스를 제시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그의 잘못된 이해는 잘못된 구원론을 주장하게 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끌었으며, 또한 인간을 미완성의 존재로 이해한 동방교회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주장하도록 이끌었음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중세기에는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자연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기의 이러한 견해를 강하게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견해를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으로 인하여 발생한 자연신학에 대한 논쟁은 20세기에서도 바르트와 브룬너를 통해서 다시 나타났고 그들의 신학은 계승되기도 하였고 또 비판되기도 하였다.

현대 개혁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여전히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정하는 몇가지 공통적인 점들도 있다. 첫째는 창 1:26~27 말씀의 형상모양에 대한 구별을 거부하고 하나의 의미를 중첩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이나 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의 통일체로서의 전인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 그 가장 기본이라는 것이며, 넷째는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으나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점 등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가 정립되어 있으면 인간론의 가장 기초가 확보되며 이에 따라 죄와 타락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하여, 심지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할 수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전인적인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