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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부모 사랑 자녀 사랑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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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듯 부모와 지식과의 관계와 사랑은 참 특별하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것이란 세다가도 그만 두어야 할 만큼 많다.
그 많은 좋은 것을 우선 순위를 매기면 무엇이 먼저일까?
아마도 주고 싶고 해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한참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녀가 당연히 이런 부모의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믿을 거라고 가정하고 추측한다.
그런데도 어린 자녀는 물론 이미 성인인 자녀까지도 사랑이 표현되는 범위에서만 부모의 사랑을 정의하고 확인하게 된다.

관계 형성만으로는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의 범주에 불과하지, 아직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 많은 엄마 아빠"로 만들어 주진 못 한다. 아니면..적어도 자녀가 부모의 아낌 없는 사랑을 같은 사랑의 코드로 받아 들이냐는 것이 부모 자녀 사이에 또 다른 이슈로 등장한다. 

사랑은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상대방이 사랑으로 느끼고 믿어주고 또한 사랑으로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 부모는 "부모이기에 자녀를 당연히 사랑한다"는 생각과 전제에 머물지 말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자녀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노력과 의지, 그리고 훈련이 있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 마음으로 전달받고 믿게 된다.
그렇다. 아이가 느끼고 믿는 부모의 사랑은 한 동안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순간적이다. 그래서 계속 되풀이되어 표현 되어야만 직접적인 사랑의 표현이 없을 때에라도 불안해 하거나 안정감을 잃지 않는다. 그래야만 설사 부모가 실망할 일이 생겨도 피하거나 숨기려 들지 않는다.

어떤 청년은 한참 성인이 된 후 ‘차에 기름 있니?” 라고 묻던 아버지의 말을 떠 올리며 그런 실생활의 언어가 그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표현이자 사랑의 언어였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이혼으로 어쩌다 아주 가끔 아빠를 만났다고 하는 '션'은 아빠에 대한 기억은 항상 ‘새 운동화’로 기억한다. 운동화가 연상되어 붙잡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유일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렇게라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느낄 수 있게 많이 표현되지 않은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아들의 마음은 기특하지만 우리의 자녀가 뭔 훗날 엄마 아빠의 사랑의 표현을 찾아 지난 세월 속으로 구 만 리 헤매야 한다면 안타까움에 다시 세월을 거꾸로 돌리고라도 다시 제대로 사랑하고 싶을 것 같다.
부모의 사랑이 깊은 우물과 같아서 두레박으로 안간힘을 들여 끌어 올려야만 한다면 사랑이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포기하고 말 수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있는 큰집에 다니러 갔다. 기차 여행에 피곤한 탓이었는지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아버지 품에 안겨 있었고 사촌 언니들이 쭉 둘러 앉아 지켜 보고 있었다. 놀고 싶은 맘에 얼른 내려 올 법도 하건만 나는 아버지한데 안겨 있는 것이 너무 좋아 그냥 더 자고 싶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맏인 나는 동생들 때문에 엄마/아버지가 이미 내 '차례'가 아니었다. 어쩌다 너무도 오랜 만에 내 차지가 된 아빠 품 안에 더 머물고 싶었다. 초등학교 1학년의 수준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자마자 외국 지사에 근무하시는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 살게 되었다. 나는 엄마와 동생들보다 먼저 건너 갔다. 아버지는 당시 한국서는 감히 쉽게 먹을 수도 없던 바나나와 초컬릿 등 먹을 것을 잔뜩 사 오셔셔 냉장고에 넣으시며 ‘니 동생들 오기 전에 실컷 먹어라.  나중에 또 빼앗기고 못 먹지 말고…” 하셨다.
그 말씀이 나를 얼마나 기세등등 하게 했는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지금껏, 동생들에게 하잘 데 없는 사탕 하나라도 항상 양보하고 아니면  빼앗기고 사는 언니요 누나였다. 이제 더는 동생들 탓에 속상해 할 나이가 아닌데도 그날은 언니도 누나도 아닌 아버지의 잠시나마 유일한 자식인 것이 나의 입지를 더 굳건하게 한 것 같다.

나만을 위한 바나나와 초컬릿, 그리고 "너의 양보와 희생, 억울함도 다 알고 있단다"로 해석되는 아버지 말씀에 적잖이 놀랬다. 나는 아직도 채워져야 하고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하고 피부로 느껴야 하는 부모의 사랑과 사랑의 표현이 필요한 아이에 불과했다.

한동안 마음 속 어딘가에 그냥 묻어 둔 채 잊었던 어딘지 모르게 아쉽고 서운했던 그 마음. 하지만 그릇마다 가득하던 물이 태양 아래 증발해 버리듯, 아버지의 사랑이 그 마음을 순식간에 다 물려 버린 것이다.

아버지랑 마주 앉아 신나게 토론하던 기억에 실소를 머금는다.
어떻게 흘러 들어 온 주제였는지는 모르나 ‘부모와 자식’에 관한 토론이었던 거 같다. 나는 열띤 나의 일방적인 논리를 펼치느라 한 피치 높던 내 목소리가 아직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의 반론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단지 그저 웃으시던 모습만 기억에 선하다. 돌이켜보건대 내게 바나나와 초콜릿으로 표현된 사랑에 힘입어 아버지의 다른 관점엔 아랑곳없이 마음껏 내 의사를 표현하는 삼매경에 빠졌던 것 같다.

표현하는 부모의 사랑은 이렇게 놀라운 힘이 있다.
갑자기 부풀려진 자부심과 자신감 덕분에 나 스스로 나의 다른 면을 보았던 것 같다. 나는 그전까지만 해도 내 생각을 어른이나 아버지 앞에 서슴 없이 쏟아 내는 담력 있는 아이는 절대 아니었다.

이젠 다 큰 것 같은 나의 아들아이.
아직도 엄마 아빠의 품을 넘나든다.
사랑받기 위해서.
너무 커 버려서 안아 줄 수도 없지만 자기의 ‘사랑 통’이 비었다며 안기는 아이.
사랑의 표현은 서로를 행복하게 만든다. 점점 비어져 가는 ‘사랑 통’을 많은 사랑의 표현으로 계속 채워 주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의 적절한 사랑의 표현과 올바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는 불행하다 못해 자신의 존재 가치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어릴 때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의 결핍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한다. 즉,
자존감(self-esteem)의 문제가 생긴다. 
 
자존감(self-esteem) 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받는 메시지로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점점 커 가며 주변의 부모 외의 사람들 - 교사나, 친구, 친척, 형제, 그 밖에 아이를 돌보는 사람까지 아이에게 영향력이 있는 모든 이는 아이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뭐니뭐니해도 부모의 영향이 그  누구보다도 크다는 것.

자존감이라면, 대부분 자신을 부족하고, 자격이 없고, 사랑받을 만 하지 못하며, 무능력하게 보는, 부정적인 자아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가 사고 전반에 침투하여 잘못된 자신에 대한 전제와 또 좌절로 몰고 간다고 본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핵심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엇을 하는 것’이다. 즉,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자신 앞에 놓인 과제 또는 일을 해 내므로  원하는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자신의 가치(worthiness) 내지 할 만한 자격이다.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그저 자신에 대한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것과 연관되고 이러한 목표를 위해 헌신할 때 느끼는 만족을 의미한다.

건강하지 못하거나 낮은 자존감은 어려서부터 형성된다.

우리가 조절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처한 상황에 상관 없이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다. 건강한 자존감의 소유자로 성장하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한다는 말과 표현은 아껴서는 안 된다. 쓰면 쓸수록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많이 생기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도 선택이다" 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선택하는 헌신-중요하다. 그러나, 사랑하고자 하는 결단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일방적인 헌신과 보호도 자녀에게 무시 당할  수 있다. 서로 사랑의 코드가 맞지 않을 때는 제아무리 기막힌 희생과 정성 그리고 헌신도 무의미해진다

새로운 자녀교육 방법론을 찾아 다니는 부모들이 많다. 좋은 책과 자료도 많이 나와있다. 그러나 그럴 듯한 다양한 방법론에 앞서, 사랑의 대상인 아이 하나하나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마다 배우는 방법이 다르다. 인포메이션을 처리하고 저장하는 방법도 다르다. 관심사도 다르다. 재능도 다 다르다. 성향도 성격도 다르다. 반응하는 속도와 방법도 다르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관찰하면서 아이를 알아야 아이에게 맞는 사랑하는 방법과 표현도 적용할 수 있다. 

어느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가 선택한 사랑의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방황하는 아이. 그 누구의 말도 귀에 안 들린다. 자신도 왜 그리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는지를 모른다.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아들을 엄마는 잠 안 자고 기다리지 않는다. 잔소리나 큰소리는 더욱 안 낸다.

그 대신 아들은 매일 밤 베개 밑에 놓인 엄마의 편지를 발견한다.

"..너는 나의 아들이며…네가 어떤 실수를 해도.. 사랑한다.. ."

하루도 안 빠지고 아들은 읽는다. 아침에 서로 마주 보아도 엄마와 아들은 편지에 대한 얘기는 절대로 안 한다. 나중에 철이 든 아들은 매 번 밤 늦게 집에 들어 올  때 마다 혹시 오늘은 엄마의 편지가 없을까 봐 조마조마 했다고 한다. 어김 없이 베개 밑에 놓여 있는 엄마의 편지를 발견하곤 안도의 숨을 내쉰다. 

자신도 모르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던 질풍 같은 사춘기 시절.
더는 부모가 필요 없는 듯 어른인 척 하는 아이들. 그러나 실은 아직도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청소년인 아이. 엄마의 편지에 표현된 무조건적인 사랑에 안심하는 어린아이다. 이렇게 어른과 아이로 왔다 갔다 하며 부모를 혼동시키는 아이들이다. 나의 아이와 상황에 맞는 지혜로운 사랑의 표현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 온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의 학교 성적이 떨어지거나 외모에 변화가 올 때 아이가 달라지는 것을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변화에 민감해진다. 남자 아이의 긴 머리. 일부러 짝짝이인 양말을 신는 아이. 붉으락푸르락한 머리 색깔. 찢어지고 구멍 난 옷.  무표정한 얼굴. 편하게 어른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 부모나 다른 어른의 눈을 끌고도 남는다.

그러나, 겉모습이 더 이상해지면 해질수록 겉에 보이는 것을 건너 뛰어 관심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 받고 싶어 하는 혼란에 빠진 방황하는 아이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겉에 보이는 것을 지적하고 고치려 할수록 자신의 내면에서 겪고 있는 방황, 혼동, 분노, 상처에는 무관심하고, 부모나 교사가 자기 방식대로 그들의 외모와 치장을 뜯어 고치려 하는 것에 반발하고 실망한다. 즉, 원인 보다는 나타나는 증세에 더 관심을 보일 경우이다.

머리가 아픈 경우 그 원인은 다양하다.
어쩌다 간혹 있는 두통은 두통약으로 쉽게 나을 수도 있지만 다른 심각한 요인도 있듯이 상황과 변화의 원인 규명이 우선이다.
그리고, 수용하는 모습은 일단 상대방이 방어하고 전투하는 준비 자세에서 느슨하게 만든다. 스스로 마음을 열 수도 있다.
이들처럼 복음에 민감한 부류가 있겠는가? 

사랑도, 사랑의 표현도 진리에 근거한 사랑일 때 진정한 빛을 발한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나의  유익을 구하려다 아이 영혼의 자유마저 구속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나의 아이를 창조하시고 그만의 독특한 재능을 주셨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알아 가고 인정하는 과정을 부모는 감내해야 한다. 

세속적 수요의 법칙에 매여, 또는 남의 자녀가 가진 재능을 시기하여 비교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 아이만이 이룰 수 있고 될 수 있는 베스트를 허용하지 않는 것과 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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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즉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한 아이를 기묘하게 지으신 하나님. 그분이 허락하신 재능이 발굴되고 현실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이 과정은 구속이 아닌 자유 안에서 바라고 믿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다 집착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잠시 맡겨진 보물, 보살피고 도와야 할 연약한 생명을 온유하게 참고 믿어 주며 성내지 아니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돌봐야 한다.
언젠가는 독립하여 자신을 책임지는 어른으로, 한 가정을 책임지는 부모로,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한 사회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을 섬기는 주의 일군으로  커 가도록 독립심을 길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떠나 보내야 한다.
자녀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다 속단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할 수도 있다.
심사숙고하지 않은 언행심사는 상대방을 성나게 하며 상처를 준다. 그리고 멀어지고 떠나게 하기도 한다. 오래참음으로 견디고 인내할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힌다. 화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다 걱정근심으로 변하여 자녀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 부모의 나약함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로 표현될 때 자녀에게는 큰 힘이 된다. 부족하건 넘치건 간에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우리의 아이들이다.

부족하다고 믿어 주지 않으면 피다 마는 꽃처럼 시들 수도 있다.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고 좌절할 때 참고 견디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바라는 부모의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놀라고 근심걱정하기보다는 "기도할게, 너도 기도해" "하나님이 도와 주셔" 하고 말 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도 사랑의 표현이다. 부족해도 설사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게 부어진다.

아니면 넘치는 자녀에게  더 무례하게 요구하지 않고 남에게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사랑인 것 같으면서도 사랑이 아닌 속박과 집착, 속단과 염려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믿으며 자녀가 건강한 자존감을 갖은 성인으로 커 가는데 큰 걸림돌이다. 

진리 앞에 겸손하자.
그리고 진리에 근거한 사랑을 하자.
불완전한 부모의 사랑 외에 또 다른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유일하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완전한 사랑이 있음을 보여 주자.
이 사랑이야 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