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 글 저런 글

기독교 장례문화라는 것



[사진은 고 배형규 목사 장례식 광경. 글 내용과 직접은 무관함]

수시로 접해 왔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기독교 장례문화를 다시 돌아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기독교가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다는 데서 간혹 당혹감을 느끼곤 합니다.
나의 은사 한 분은 장례식이 아닌 "천국입장식"이 돼야 한다는 말씀을 평소 하시곤 했는데, 그분 당신의 장례 절차가 그러지 못해 아쉬운 맘,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마다 장례문화라는 것에 묶여야 하는지요.
왜 자신을 문화의 노예로 삼습니까. 고인을 위해섭니까, 자신을 위해섭니까?
이미 앞서 간 고인이 애도의 검정색 문화를 애틋해 하고 고마워 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문화를 완전히 탈피할 순 없지만 거기 예속돼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나라 문화에 맞게 세상 문화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례문화에서 나를 거북살스럽게 하는 것 한 가지가 이 블랰 칼러-검정색입니다!
안 그래도 우리네는 머리털과 눈썹, 눈동자까지도 검은데 사람마다 머리부터 양말까지 검정색으로 뒤집어 쓰면서 흑색통일을 해야 하는 때가 장례식입니다. 단 한 명도 예외가 아니더군요. 아니 예외일 수 있음을 거부하더군요. '예외'라고 해 봐야 소복이나 삼베옷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인사의 장례식 도중 검정색 문화에서 이탈하는 사람은 자칫 된서리를 맞게 되든가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됩니다. 빨강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가는 '검정나라'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게 될 터입니다.
 
하지만 성경엔 검정색 문화란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평생 이 색깔에 있어 세상에 묶여 지냅니다. 왜 장례식엔 빨강 넼타이를 매고 나타날 순 없는지요? 이해가 가지질 않습니다.
빨강은 크리스토의 보혈을 상징한다고도 충분히 말할 수 있건만, 장례식에선 다들 보혈을 싫어하나 봅니다. 빨강 십자가는 눈에 띄어도 빨강 넥타이는 용납되질 않습니다. 모순 아닌가요?

성도가 죽으면, 고인을 애도하고 가족을 위로하고 시신을 묻기만 하면 되련만..
기독교 장례문화 주변엔 세상 문화에 맞춘 듯 숱한 종류의 '예배'들이 줄 잇습니다.

입관예배, 장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추모예배..

그러는 동안 유족들은 3일장이다 4일장이다 5일장이다 하면서
장의사에 밤새 머물기도 합니다.
유족들이 삼가 조의를 표해 온 조객들의 위로를 받기 위해
검정옷을 입고 기다리고 추모실 마룻바닥에서 거의 뒹굴다시피 하며 지냅니다.
특히 장례식이 추운 겨울일 때 상황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유족들의 외투만 벗어 구석에 쌓아 놓아도 추모실이 그득 찰 지경입니다.   

상주는 늘 검정양복이나 베옷을 갖춰 입고 찾아온 조객들의 종교배경에 따라 또는 무관하게 깍듯이 엎드려 상배(相拜)를 하거나 정중히 허리를 굽힙니다. 온종일 그러다 보면 실로 만만찮은 허리운동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잠시 기분전환을 하면서 떠드는 동안 불시에 추모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애써 찾아 온 추모객들에겐 늘 조반/점심/만찬 대접을 하는 것, 무료 주차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게 예의이고 상례입니다.

상주가 잠이 모자라도 참아야만 하고 조객들 앞에서 끄덕끄덕 졸거나 잠시 누워 눈을 붙이는 동안 조객들이 찾아 와 어쩔 수 없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나, '상중'이라는 미명 때문에 적당히 무마되기도 합니다. "한시라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란 말씀도 이런 경우엔 해당되기 힘듭니다.  

이런 과정 속에 장의사와의 다양한 상업적 거래도 이뤄집니다.
그래야만 교회도 유족도 장의사도 만족스럽고 편해지는 모양입니다.
위로도 돈(조의금)으로 해야 좀 더 본격적이고 성의가 있어 뵙니다.
수의를 입히고 '염'을 할 때 일꾼들은 "천국 가는 길에 노잣돈" 제공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정작 누가 천국길을 가는지조차 혼란스럽습니다.

하관 때에는 고인의 일명 '영정' 사진이나 명패를 앞세우기도 합니다.
묘원묘지 관리비 외에도 묘파기/하관작업 일꾼들이 따로 은근한 거액(?)의 '팊'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천국길 노잣돈'의 일환인가..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신약에서의 장례 행사는 지극히 단순해 보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이를 묻게 하라고 하실 정도니까.
이것 좀..주님 말씀처럼 정말 단순화될 순 없을까요?

또, 기독교 장례문화엔 언제나 정해진 '곡목'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어떻게 보면, 내용상 다분히 염세적인 찬송가들이 지정돼 있다시피 하고 그것 아니면 안되는 줄로 다들 압니다. 그래서 장례행렬이나 장의사/장지로 가는 차 안에서 레퍼토리로 줄을 잇습니다.
내 어머니 장례기간 중에도 누군가 지적했지만, 찬송가 대다수는 중간 이후 절에서 반드시 '천국' 낱말이 나타납니다. 찬송가 속 '천국'은 거의 언제나 내세를 말하지, 현세에서의 내 영혼 속 천국은 거의 다루질 않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장례행렬 속의 찬송가는 정말 천국 입국 감사 찬송인지, 순전히 유족위안용인지 구분이 잘 가질 않지요.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물론 우리 누구나 영원한 내세를 바라고 기다리지만 성령님의 천국을 현세의 참 교회에서, 내 속에서 누릴 수 있음을 실감하는 데 있어 되레 방해가 되는 요인의 하나가 바로 이 내세중심주의적 천국관입니다.

장의사 차 안에서 곁에 앉은 한 사람은 그러더군요. 도대체 찬송가는 죽음을 이기게 하는 것이냐, 죽음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냐고요. 그런 혼동은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특히 성도의 장례식 때 그렇습니다. 이 점을 좀 확실하게 얘기해 보죠.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개인의 목숨을 거둬 간다는 생각입니다. 구약적인 사고방식이지요. 어느 소녀는 하나님이 엄마를 데려갔다는 생각에 평생 한숨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지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지요. 이런 잘못된 생각은 주로 교회나 목회자의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절대주권주의적 사고 방식 한 가지가 하나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도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사망의 주권자가 누군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사망은 최후에 정복돼야 할 우리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왔습니다.
그 죽음을 지금까지 싸탄 마귀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크리스토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아직 인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크리스토께선 십자가 위에서 모든 저주를 도말하셨지만 성도도 여전히 죽습니다.

구약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죄와 마귀로부터 옵니다.
성도의 죽음은 귀하지만, 죽음 자체가 귀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달콤한 죽음아, 고요히 어서 오라!" 고 대담한(?) 사망환영의사를 표명하지만..
적과 나-피아를 구분 못하는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나의 원수입니다.
크리스토께서는 사망 권세의 쇠사슬을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 안에 죽는 사람은 비록 몸은 죽어도 신령한 몸으로 되살아나며, 영과 함께 영원히 하늘에서 살게 되는 승리의 존재입니다.

성경은 순교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까지 귀하게 보진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이 귀하다면서 동시에 성도가 오래 살아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섬김과 복음 전파 사역을 다하길 촉구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외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느니 일찍일찍 편하게 가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은 자살과 조기사망을 부추기는 안락사적 자세이지, 성경적이 아닙니다.  

보약 먹고 질기게 목숨을 잇느니 곱게 일찍 간다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살 몫을 충실히 다 살다 가는 것이 올바릅니다.
횡사나 조기사망이 표본이 아니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낙태 되는 어린이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오늘날 성경적, 기독교적 장수가 아니라, '일찍 곱게 가기'운동이 마치 기독교적인 것처럼 포장되는 현상은 묘합니다. "고생하시게 말고 일찍 곱게 가시게 하자"는 말이 입에 발린 듯한 일부 목회자들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오, 천만예요!
야콥처럼 한 평생 나그네길로 고생하면서도 오래 사는 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 속에서 우리는 바른 판단력을 일깨워야 합니다.

기독교 장례문화는 곧 천국 축제여야 합니다.
천군 천사들의 케이스처럼 아무개의 "천국입장 환영식"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장례식은 슬픔의 이별과 동시에 조만간의 기쁨의 재회를 예고해 주는 행사여야 합니다.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미래의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를 미리 만끽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울음과 재 대신 천국 간 기쁨의 화관을 써야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고 라자루스의 죽음 소식에 그리고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게 사실입니다. 그리운 사람들이 떠나곤 할 때 성도들이 몹씨 아쉬워하고 애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눈물을 흘리게 하시듯,
장례식엔 아쉬움의 눈물 뿐 아니라 감사와 기쁨의 미소도 있어야 합니다.
시커먼 검정색 문화만이 아닌 보혈의 문화색도 돋보여야 합니다.
일반 세상은 몰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라면 검정색 통일이 아니라 자유롭고 다채로운 색깔도 용납되고 관용돼야 합니다.

찬송가도 염세성을 탈피해 영감과 성령충만한 건전한 노래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입장식 축가라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권능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삼가 추스르며 마냥 의기소침해 질 게 아니라
나도 갈 미래의 천국을 그리며 기쁨의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령이어야 합니다. 

검은 죽음 빛..
일방적인 우울한 죽음의 문화..
이거, 좀 탈피합시다.


 

'이런 글 저런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며 살아도  (1) 2009.03.02
위선의 양파껍질  (5) 2009.01.18
눈 내린 산장에서  (0) 2009.01.17
어머니를 회상하며  (20) 2009.01.06
2009년 새해를 맞아  (1) 200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