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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정.결혼

남편들이여 (뉴하우스)





가정이 위협 당한 지 이미 오래이고 제 자리를 벗어난 남녀는 계속 방황한다. 가정의 소중함, 아내와 남편의 역할, 각자의 가정을 향한 책임감이나 의무감 등을, 더는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돼 온 "가정을 지킨다"는 말이 되레 무색할 정도로 이혼율이 치솟는다.

주변에 상처 난 가정의 고통 받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통속적인 말로 그들의 아픔을 다독이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이들의 상태는 심각하다.

남녀 당사자뿐이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자녀들까지 가족 모두가 피해자다. 가정의 불화로 말미암아 그 누구도 받는 혜택이 없다.

행복한 가정/부부와 남녀 관계를 위한 도서는 너도 나도 최상품 비타민임을 자처하면서 물밀 듯 쏟아져 나오고, 어떤 부부 문제라도 당장 해결될 듯 나름 최선의 아이디어와 방법론을 내 놓건만 이혼율은 줄어 들 기색이 없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고, 가정의 울타리는 가차 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어른들의 불화 속에 더는 상처 받기를 거부하는 아이는 본능적으로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은둔하기도 하고, 피해 받기를 거부하는 어떤 아이의 속사람은 냉동 저장품처럼 꽁꽁 얼어 붙기도 한다.
더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무감각함은 아픔을 조금은 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터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그것이다.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는 여유와 의미 있는 대화, 안정된 정서, 사랑의 표현, 존중감과 격려, 그리고 꿈을 심어주고 키우는 것은 이들에겐 다 사치품이다.

세상을 살면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과 용기,  그리고 서로 어우러져 사는 법, 남을 사랑하는 법, 어려움과 좌절을 극복하는 강인함을 배우는 대신, 혼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 가치마저 위협을 받고 혼란스러워 한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꽃도 피기 전 봉오리 째 시들어 간다. 

요즘은 이런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현실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본다.

오래 전 열심과 열정으로  성도를 섬기던 가정의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는 부부의 연이 끊긴 지 오래였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어느 열성 장로님 부부도 이혼한 지가 오래라고 한다.

청소년과 청년의 시기를 우리 부부와 함께  보낸 누군가의 결혼도 이혼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그의 친구들이 들려 준다. 어느 사역자가 아내와 어린 자녀를 버리고 자신이 상담하던 여성과 가정을 꾸린 센세이셔널한 이야기는 이 큰 미국  땅이 넓은 줄 모르고 퍼진다. 사역자의 외도가 신문 전면을 장식한다.

어느 모임에서 참하고 아주 조용한 여성을 만났다. 얼굴에 기쁨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무표정 속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이 내 눈길을 끌고도 남았다. 그녀가 자리를 뜬 후에야 그 집 주인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 부인임을 알게 됐다. 그 교회의 목사와 사모는 서로 말을 안 하는 사이라고 한다. 

이 땅에 완벽한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가정조차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실은 그리스도인은 완벽함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세속적인 기준과 기대를 무분별하게 좇아가는 삶으로 완벽함을 정의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공로로 입혀진 ‘의의 가운’을 입고 이미 깨끗해진 의로운 사람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참담한 현실을 보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그리고 말씀으로 자신과 가정을 돌아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의 겸허함과 단호함이 무척 아쉬운 때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 더는 지불할 죄의 대가가 없게 대신 자신의 몸으로 나의 죄를 갚으신 그 사랑. 그 분의 의롭고 거룩한 예복을 입혀주신 그 사랑의 깊음과 높음과 넓음을 감히 다 헤아린다고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사랑의 맛을 본 사람이 성도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특별한 사람이자 구분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 사랑의 위력이 성도가 말씀을 사모하고 순복하게 하지 않던가? 이 사랑의 위력이 성도를 죄의 유혹에서 지켜주지 않는가?

그럼에도, 흔히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의 교회 안에는 이 사랑의 위력이 없다.

세속적인 가치 기준과 아직 죄에 종 노릇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여느 비신자들과의 가정과 다를 것이 없다면? 아니 그보다도 못하다면? 

이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림이요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겐 거침돌이다.

설마, 이 많은 남녀가 철저히 계산적인 의도로 그저 천국행 기차표를 공짜로 구입한, 무늬만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인가? 아니면, 우리를 자녀 삼으신 그 크신 사랑이 아직도 부족하여 이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성령의 열매는커녕 그저 육신의 열매가 내 삶에 내 가정에 주렁주렁 맺혀도 그 모습에 경악하지도 움쩍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과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내 자신에게 이 질문을 자주 던진다. 그저 허공을 치되 소리 안 나는 나 혼자의 독백..회생할 수 없는 불치병 환자 앞에서 느끼는 그 침통함, 그 답답함, 무기력함 그리고 좌절이 배어있는 아무 의미 없는 허무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결혼 생활에  대해 누구나 갖는 이상이 있다. 나름의 결혼 생활에 대한 철학과 신념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절대화한 공식도 생겨난다. 문화권마다 다른 결혼의 정의도 있다.

이런 다양한 견해와 방법론의 홍수 속에서 헤매다 보면 아무도 이미 갖고 있는 각자의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성경 말씀에서 답을 찾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절대적인 말씀마저도 내가 가진 그 무엇으로 필터링 할 수 있기에 조심스럽다.

그런데도-이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이렇게 주님의 말씀과 기막힌 사랑의 위력이 약화하고 ‘나의 양은 내 말을 듣는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색하리만치 말씀과는 무관한 자로 충분히 살아 가는 남녀의 현실이 안타까울지라도, 나는 믿고 싶다 - 말씀의 위력을. 그리고 희망을 품어본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까지 어떤 영향과 연줄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과 관념이 형성되었든 간에 성경이 아닌 그 어느 다른 것을 절대적인 대책 내지 해법으로 주장하거나 요구하기에 앞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가정과 남녀에게 주시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려는 간절함과 순수함 그리고 겸손함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살아서 역사하는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 심령의 골수를 쪼개는 말씀의 능력을 믿기에,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담기를, 입술에 가까이하기를 소원해 본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라고 내가 던지는 의문이 주는 좌절과 낙심의 뉘앙스 대신 희망과 용기를, 그리고 변화를 기대하게 하게 할 유일한 희망인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위력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대신 말씀에 순종하며 조금씩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은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가능한 소망이요 믿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저런 행복한 남녀 관계를 위한 팁이나 방법론보다는 말씀이 주시는 불변의 법칙은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하나님이 가정을 위해 그려 주신 블루 프린트는 최초의 인류를 창조하시던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행복하고 질서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가장 작은 교회인 우리의 가정.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는 경건한 가정으로,  가정의 구성원이 영적으로 교통하며 행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자 명령은 오늘날도 절대적인 진리이다. 이 진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남편과 아내는 불화하며 가정은 병든다. 

아무리 세월이 가고 시대의 변천이 있다 한들 그리고 천지가 없어진다 한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성경에서 보여 주시는 남녀가 결혼하여 살아 가는 방법도 우리에게 주어진 불변하는 법칙이자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기에 순종하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남녀가 창조되는 과정부터  살펴 보면,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고 남자는 돕는 배필이 필요하시다고 말씀하신다.
새로 여자를 따로 창조하시지 않고 남자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남녀 연합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남녀는 서로서로를 필요하게 창조하셨다. 홀로는 불가능하고 서로의 필요는 다르지만 둘이서는 가능한 성장과 완성.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나아가는 남녀의 역할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2-23) 

하나님이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신 여자를 남자에게 데려오시자 남자가 말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고백이 오늘날 이 시대의 남편의 고백은 될 수 없을까? 사도 바울도 남편들에게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명하셨지 않나?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이루어져 왔다. 성경은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라고 말하며 그 비밀이 크다고 명시한다. 

하지만 ‘하나가 되는’ 이 결합은 단순히 육체의 연합만은 아니다. 남녀의 영적인 결합을 빼 놓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됨’이다. 같이 기업을 받을 자로 한 육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비밀의 축복을 유일하게 같이 나눌 수 있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며 사람이 가르지 못하는 창조의 목적이요 순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남편은 아내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한 가정의 영적 리더로 세워진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완성해 나간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도인 남녀가 주님을 닮아가는 이 과정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아내와 남편이 함께 주님의 도구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5;21-33절은 좀 더 구체적인 남녀의 역할과 부부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명령이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말씀에서 보듯,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한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섬기셨는지 어떤 희생을 하셨는지 예를 들어 남편과 아내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남녀 역할의 범주까지 말해 준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과 같다고 한다. 명료하게 보여 주는 가정의 질서와 남녀의 서로 다른 역할은 사도 바울의 시대와 문화권에 한정되지 않는다. 많은 여성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 에 저항하는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남성 우월주의나 여성 배타적인 사상은 더욱 아니다. 

남녀 모두가 너무도 많은 오해와 억측을 하고 남용하는 남편의 권위.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재고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유인즉,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무너지고 남녀가 고통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소금과 빛은 커녕, 힘을 잃고 세상의 조롱거리와 비웃음을 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에게는 거침돌이 되는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주신 달란트는 빛을 발하지도 못한다.

남편의 아내의 ‘머리됨’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성경은 남편의 머리됨(headship)을 어떤 이기적인 생각과 말, 행동으로도 정의하거나 연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만을 섬기게 함으로 자신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또한 많은 아내가 남편의 수동성에 대한 불만과 염려가 더 크다는 보고가 나와 있듯이, 성경적인 ‘머리됨’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고 활동하는 것이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수동성을 뜻함은 더욱 아니다.

수동적인 남편은 자신과 자신의 일에만 빠져 있거나 자신의 세계 속에서 두문불출하며 가족의 필요에 무반응하다. 남편의 수동성을 못 견디는 아내는 언어의 바늘을 사용하여 좀 더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런 남편은 계속 수동적으로 견디기만 하다 인내심이 바닥 날 때쯤 폭발하지만, 다시 수동적인 모드로 돌아가고 만다.

남편의 ‘머리됨’은 행동을 의미하지 아무런 액션이 따르지 않는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머리됨’은 권위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상전의 권위도 부모의 권위도 허락하셨듯이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를 허락하셨다. 아내의 머리됨을 허락하시고 이 권위에 아내는 복종할 것을 명하신다. 하지만, 이 권위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권위임을 그리스도인 남편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5:25)

남편에게는 가정의 영적인 리더로서의 책임을 위해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시고 권위를 주셨다. ‘머리됨’은 남편의 리더쉽에 대한 싸인이다. 

그리고, ‘머리됨’은 섬김의 표현이다. 다스리는 자의 권위를 허락하시데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권위이기에 섬김의 표현이지 군림하거나 불의한 행동의 합리화를 위한 도구는 아니다. 이는 일방적인 요구와 억지를 부리기 위한 권력의 남용을 위함도 아니다.

에베소서 5장 21절은 나머지 내용의 아치(arch) 역할을 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모두 서로 피차에 복종(submit)하라는 말씀의 전제 아래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의 관계를 예로 들고 있다.

권위를 주시고 책임을 맡은 자에게는 복종할 것을 말씀하지 않으나 대신 희생할 것을 명령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동반하는 남편의 ‘머리됨’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처럼,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아내의 머리된 남편도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자신을 줌으로 섬길 것을 명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진정한 ‘머리됨’이요 권위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5:1-2)

그렇다면 아내의 머리인 남편의 희생적인 섬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같이, 아내의 머리 된 남편 역시 아내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 아내를 하나님 앞에 영화롭게 할 책임과 의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함과 성화의 여정에 남편의 영적 리더쉽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미 ‘한 육체’ 된 아내를 자신의 몸과 같이 양육하고 보호하며  영광스러운 광채가 아내의 얼굴에서 나타나도록 아내가 거룩해지는 성화의 목적이 남편의 ‘머리됨’의 의무요 책임이다.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은 은혜이듯, 아내의 머리인 남편은 은혜로 아내의 성장을 돕고 아내를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경건한 그리스도인 남편의 역할이다. 

남편들은 사랑 받는 아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 그 녀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를 본 적이 있나?

남편의 보호 아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뢰하는 아내의 얼굴빛을 본 적이 있나?
 
가정과 아내를 섬기고 잘 다스리는 남편이 교회에서 성도를 가르치고 섬기며, 교회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의  자격으로 명시하지 않으셨나?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더 큰 일도 맡기신다고 하지 않으셨나?

그리스도인  남편들이여. 
아내의 머리된 남편들이여.
 
남편들이 바라보고 닮아 갈 사람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아내를 사랑하자.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에서  영광스런 광채가 보이는 날까지 양육하고 보호하여 흠이 없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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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 5: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