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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십일조론

십일조에 숨은 비밀과 법칙

 


김삼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행위언약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할례와는 다르다. 야콥이 드린 십일조, 그것은 복의 채널을 위한 야콥 스스로의 서원을 통한 언약이었다. 아버지 이짜크에게서 배운 것이다.

하나님은 한때 모쉐를 통해 십일조를 율법화하셨다. 성전이 있을 동안 주로 레비 족의 생계를 위한 배려였으며 동시에 복의 채널을 위한 순종의 교육이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의 첫 행위언약처럼 행위언약을 교육의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누리지만 순종보다 억지제사 즉 희생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십일조를 내기 거부하는 사람들은 헌금이 더 쉽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반대다. 십일조는 '냄의 법칙'(Law of Giving)에 따라 으레 내게도 되지만 헌금은 여간만 자발적인 정신이 아니면 적당히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가 더 많다.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평균 20%만 십일조를 한다. 나머지 80% 교인들은 안 낸다는 얘기다. 미국교회 다수가 십일조를 내고 받는다. 미국교회 재정의 절반 이상이 십일조로부터 온다. 미국 교인들은 예로부터 세계적으로 기부와 자선, 구제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6.25 때 한국을 도운 많은 미국 구호품들의 상당량은 십일조와 기부금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바나리서치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낸 사람은 전체 성인교인의 3%에 불과했다. 2001년(성인들의 8%)에 비해 62%나 줄었다는 얘기다. 거듭난 교인들조차도 2001년 14%였던 것이 2002년 6%였다.

이것은 테러와 경제 불안 요소 등의 작용도 있지만, 신세대들이 구세대 교인들의 십일조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얘기도 된다. 또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십일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 중대한 영향의 하나가 인터넷이다. 인터넷 도처엔 십일조를 반대하는 '반십일조신학'의 글들이 무수히 떠 있다. 안 그래도 교회로부터 부담이 없기를 바라는 그들은 이런 앤티 타이딩(anti-tithing)의 글을 반색하며 반긴다. 그러니 경제 사정이 더 어려운 한국은 오죽하랴.

어느 신학자가 지적했듯 오히려 요즘 교인들은 교회에서 뭔가 받아 내길 원하되, 주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는 그렇다. 그래서 한 목회자는 케네디 전대통령의 말을 빗대어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기 전에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할 것이 무엇인지..."란 식으로 안쓰럽게 교훈하기도 했다.

병행론과 후속 역사

구약시대 레비 족들이 십일조를 받았듯 오늘날 사역자들에게 십일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상은 6세기에 크게 보급된 생각으로 흔히 '병행론'(parallelism)이라 불린다.
동방정교회는, 젊은 율법사에게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이에게 나눠 주란 교훈에 따라 십일조를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므로 교회는 구약시대를 능가하는 것을 바쳐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속사도 교부들인 요한 크리소스톰, 퀴프리아누스, 오레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때때로 성도들의 인색함을 꾸짖곤 했다. 크리소스톰은 십일조를 내는 이들을 이상스럽게 여기는 자신의 인색한 교회에 창피를 주기도 했다.

모든 성도가 십일조하기를 촉구했던 구체적인 기록은 585년 프랑스 마송 종교회의 때부터. 교회법 속에다 정식으로 십일조 조항을 박아 넣었다. 그로부터 1000년후 트렌트 종교회의는 십일조를 거부하는 신자들을 파문하기도 했다. 이로 인한 폐단과 문제점이 많았다.

십일조는 '율법'?

십일조가 한때 율법이던 때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레비 족 제도가 있기 5세기도 더 전에 십일조가 존재했다. 아브라함도 이짜크도 야콥도 십일조를 했다. 이것은 십일조가 율법을 초월한 법칙이었다는 얘기다.
구약 당시에는 십일조가 가난한 사람들의 구호를 위해서도 적용됐다. 현대교회에 십일조가 없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과연 어떻게 제대로 도울 것인가.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은 우리와 늘 함께 있지 않은가? 가난한 사람은 율법을 초월하여 도와야 할 대상들이 아닌가.

신약에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명령도 없지만 십일조가 구약의 다른 율법과 함께 폐지됐다는 구절도 전혀 없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이것(인애와 정의)도 저버리지 말고 실천하려니와 저것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인애와 정의가 존속하는 한 십일조도 존속한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또 이로써 구약의 십일조가 새 언약으로도 계속될 것을 암시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카이자르의 것은 카이자르에게

위의, 주님 말씀에서 '하나님의 것'이 무엇이라 생각되는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이라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양심상 생각해 보면 분명히 헌금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또 이 하나님의 것이 구약시대로 종결되고 더 이상은 하나님의 것이 불필요하게 되었나?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과 표현으로써 헌금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십일조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신약시대에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없다고 하나, 기독교의 신앙의 처음과 모든 것을 마무리하다시피 한 히브리서에 십일조가 재차 강조돼 있다. 한 미국 목회자는 신약시대엔 5중 사역 즉 사도/대언자/목회자/전도자/교사들은 십일조를 받아 생활하도록 히7장에 명령돼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해석한다.

십일조는 복의 채널

십일조를 복의 도구 복의 채널로 보기 시작하는 사람은 덜 드리지 않고 더 드리게 된다. 십일조를 내도 안 내도 하나님이 똑같이 복을 내리신다면 십일조를 내는 사람에겐 불공평한 처사다. 이 점에 착안해야 한다(코린토B 9:7).
우리는 그러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고 차별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비난할 수 없다. 그분은 어디까지나 의로우시며 공평하시며 공명정대하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 주시고 그를 번창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복 내리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다(히브리서 6:9-19).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 복은 크리스토님을 통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전세계 금융재정 75% 이상을 보유하고 있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보다 더 나은 언약을 가진 우리들은 왜 그러질 못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말라키 3:10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주실 복을 예언해놨다. 십일조는 넘치고 풍부한 복의 한 원천이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릴 때 평소 건강하여 병원에 가는 일도 거의 없었고 의료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그런 간증을 하는 이들을 많이 봤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신실한 사람을 더 복 주신다. 십일조를 내고 안 내고는 본인의 자유의지다. 그러나 내는 사람은 엄청난 복을 받는다.

다음 성구를 보자: 루카 6:38, 말3:10-12 잠19:17.

십일조의 영적 대상은 하늘 대사제 크리스토

히브리서 7:8에 따르면, 십일조는 물질 자체는 교회가 받아 처리하나 영적으로는 크리스도께서 직접 받으신다. 예수님은 레위가 아닌 멜키쩨덱을 영원히 계승한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늘 대성전에서 대사제로서 중재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기꺼이 내는 사람을 사랑하신다(코B 9:7). 이것은 헌금과 십일조에 모두 해당되는 말씀이다.

사랑의 표현이자 천국시민의 예의

십일조는 이미 하늘에 속해 있는 천국시민들이 사랑으로 바치는 '하늘세금'이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몸과 소유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걸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표현의 하나가 곧 그분께 드림이다. 사랑의 원리는 서로를 주면서 자연히 받을 것을 기대한다. 어떤 사랑도 마찬가지다. 부부의 사랑도 마찬가지며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서로 주는 것으로 묶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받지 않아도 아무 손해볼 것이 없으시지만 사랑하는 대상이기에 기대하시는 바가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결정해서 자발적으로 드린다고는 하나 적당히 드릴 때 우리는 자칫 스스로를 속이는 꼴이 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청지기 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최소한 십분의 일로써 그분의 자녀인 위치로 사랑 안에 묶이길 원하신다.
그것은 사랑이면서 복의 묶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복을 내리시기를 원하신다.

서원행위의 하나

야곱은 하나님께 복을 주실 것을 요청하며 십일조로 서원했다. 우리가 신실한 하나님께 손가락을 걸고 온전히 속해있음을 증명하는 한 가지가 곧 서원하는 것이다. 서원은 율법시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고 신약시대에도 존속되고 잇다. 바울의 서원이 대표적인 예다. 하나님은 특히 서원에 관해 신실하시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식의 일부 산과 들의 모든 것들, 우리의 모든 소유, 우리의 몸까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상호호혜의 원리를 가르치신다.

이 원리는 청지기의 원리와도 통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주인이신 그분께로부터 임시로 맡은 위탁물들이다. 아담/하와에게 맡기신 천하와 에덴 통치권이 믿는 우리에게 적용된다.
헌금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할 수도 안 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하나의 묶임의 틀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부득이한 것이므로 의무적으로 하게 된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드릴 것을 드리고 보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도둑질할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불가능한 도둑질을 하고 있다. 십일조와 헌물로써 그렇다. 헌물을 우리가 아주 안 내 버릴 수 있다. 그런 교인들이 실제로 있다. 십일조는 어떤가? 율법이란 구실을 내 걸어 안내거나 안 내려는 교인들이 더 많다. 결국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업이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십일조는 광고 대상이 아니다

어떤 선행도 광고나 자기선전의 대상이 아니다. 십일조나 헌금이든 광고하면 안 된다. 마태복음 6:1을 보라. 헌금을 더 많이 걷으려는 일환으로 주보에다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까지 내거는 것은 정말 비성서적이다.

목회자는 다만 현금을 재정/회계부에 넘기고 난 헌금봉투를 일일이 들고 헌금하는 성도의 마음과 소원을 헤아려 밤낮 기도하고 복을 빌어야 한다. 개인의 헌금과 십일조 액수는 일년 상하반기나 4반기 등 정기적으로 본인에게 직접 정확히 보고돼야 한다. 그럼으로써 교회와 교인 간에 신뢰감이 쌓여간다.

끝으로 존 버니언의 2행 대구시 한 편을 인용한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더 많이 낼수록 더 많이 보유했다.

There was a man, some called him mad;
The more he gave, the more he h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