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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십일조론

주님이 가난해지셨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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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김동춘 님과의 대화에서

김삼

누가 뭐래도 십일조는 성경적, 신구약적임을 전 확신합니다. 부족하지만 원어를 통한 히브리서 연구-특히 7장-를 거쳐 얻은 결론입니다.

빈부 문제는 주님의 교훈들이 확고한 대답을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신명기와 루카복음서 4장 등을 대조해 보면, 주님의 전인적 구원에는 가난의 저주로부터의 해방도 포함됩니다. 그럼 청빈은 무엇이냐.. 유교적/수도원적 청빈 개념은 저는 잘 모르며 깊이 알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 가난도 부도 주지 마시고 다만 제게 필요한 양식을 먹여주소서."라는 아구르의 말처럼 넉넉히 가진 바를 갖고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만/자랑/자고/교만 하지 않는 자세로 풀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마 대표적인 '청빈자'로 딴 분 아닌 예수님을 꼽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물질적으로 가난했던 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난의 저주에서 해방시키러 오신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면서 교회가 할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거저 받았으니까 거저 주오"라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들은 늘 그대들과 함께 있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도와 줘야 할 이유 때문에 가난의 현존을 상기하신 것입니다.

미처 가난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가 과부를 구제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 안티옼 교회가 도운 것처럼, 코르넬리우스나 뤼디아가 이웃을 도운 것처럼, 가진 것을 나누며 온정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나눔이 곧 풍요로운 자가 살아가는 방법이며 교회가 그 주체입니다.

잠깐 비쳤지만 주님이 가난한 분이 아니셨다는 뜻은 대강 이런 것입니다. 물론 처음엔 주님의 가정도 빈궁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셒 부부가 가난했다는 건 둘이서 주님의 탄생 8일 만에 할례 기념 감사 제물로 비둘기를 드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동물 제사 중 가장 빈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동방의 박사들이 방문했을 때(박사들은 탄생보다 훨씬 이후에 왔습니다), 이들의 형편은 나아졌습니다.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예물은 당대 임금에게나 걸맞은 매우 값진 보물들이었고, 이것은 예수님 가정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밑천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몽땅 어디 갖다 바쳤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후 요셒이 일찍 가고 나서 주님이 가업을 물려 받아 가장으로서 가정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주님의 식구들은 최소 8명이었습니다. 주님 자신, 어머니 마리아, 주님의 4 형제, 그리고 최소한 2 명의 여동생들이었습니다. 대 식구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넉넉히 살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까닭은 가난을 해방시키러 오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둥지가 있는데"란 말씀을 오해해선 안됩니다.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열 둘이나 되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3년 동안 겉으로는 '무위도식'하며 사셨는데(파울은 그래도 장막이라도 기웠지만), 13명이 먹고 살 바탕이 어디서 났습니까? 매일 먹는 것도 기적으로 살았습니까? 13 식구들이 여분의 돈이 있었기에 이스카리옷 유다가 전대(은행)를 맡아 다니며 길거리에 오가는 걸인들을 구제했고, 사마리아 수가 방문 때도 제자들이 점심거리를 사러 나간 것이 아닙니까? 많은 교회가 이 사실을 잊곤 합니다.

만일 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가지신 것이 전혀 없으셨다면 3년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구걸하면서? 매일 빵이나 물고기와 포도주의 기적을 일으켜 잡수시면서? 누가 헌금을 드려서? 누가 끼니 때마다 대접하면서? 어떻게 3년간 13 식구가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고도 돈이 남아 유다를 통해 도울 수 있었겠습니까? 남을 돕는다는 말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여기 답변하실 수 있으십니까?

마지막 만찬 때도 제자들은 주님이 유다에게 빈민 구제에 돈을 쓰라 하신 줄로 오해한 일도 있습니다. 자고로 가진 것이 남는 자가 남을 도울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을 볼 때 주님이 결코 쪼들리는 삶을 사신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역 초기에 제자들에게 자기 처소로 "와 보게들" 하셔서 그들이 방문했던 주님의 거소는 결코 찌들린 냄새가 나는 초라한 곳은 아니었을 겁니다. 소박하고도 아담한 곳이었을 겁니다.

그러신 주님은, 베타니의 마리아나 또는 베타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찾아온 이름 모를 여인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때에 찾아 와 매우 값비싼 나드 향을 부어 드릴 때 이를 기꺼이 허용하셨습니다. 곁에서 제자들 또는 다른 사람들은 이를 남용과 사치로 여겼습니다. 주님의 죽음 준비가 물질보다 귀한 것이란 영적 원리는 모르고 말입니다. 주님의 빈부론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가 사회주의가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너는 부하니 네가 문제다. 우리 나눠 갖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풍요한 자 본인의 기꺼운 뜻이 있어야 합니다. 또 강제로 될 수 있는 성격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눔을 어디까지나 교회 또는 교회에 결부된 이들을 통해서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빈부 문제에 있어서는 남달리 풍요한 이들과 교회의 자체 나눔 의식이 중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빈부의 상태가 천태만상이므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빈부로 설정될지 상대적입니다. 가령 내가 백 만 원을 갖고 있더라도 천 만 원 가진 사람보다, 천 만 원 가진 사람은 억대 부자보다 억대 부자는 몇 백 억 대 부자보다 가난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하나 더 가진 것을 스스로 나눠 가지려는 마음 갖기가 필수일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패를 탈피하고 치부를 탈피하고 어리석은 부자의 경지를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주님 안에서 풍부해지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살림 부해지며"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신자들 모두가 믿음으로 풍요로워지길 원하십니다. 주님 자신도 8 식구를 부양하고 제자들을 돌보시면서도 가난을 극복하셨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주님은 실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빈민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풍요의 하나님 즉 엘 샤따이(전능하신 하나님), 야웨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존 선입관의 틀을 벗어나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가난한 자들을 구원(전인적 구원)하시러 스스로 가난해지셨다는 말씀은 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유의 가난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그 분이 가지셨던 풍요에 비해 가난해지셨다는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리를 알고 진리로 자유롭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풍요로우셨다는 말과 부자였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를 두실 곳이 없다는 구절을 많은 이들이 주님이 찢어지게 가난하심을 뜻한다고들 오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친히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아무 데나 의탁하시기 어려우심을 뜻한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도 주님이 찌들게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는 뜻의 말씀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그것은 수도원적 삶을 살았던 중세사람들이 가난을 합리화하기 위해 상상 속에 만들어낸 관념일 뿐입니다. 오히려 루카복음서 4장에 나타난 전인적인 주님의 구원사역에 모순됩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시고 객관화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셨음이 사실이라면, 3년이란 공생애 기간동안 주님과 제자들은 매일 끼니 때마다 떡과 물고기의 기적 같은 기적으로만 매일 지내셨거나, 구걸을 했거나, 아니면 굶주려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외에는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주님이 가난하게 사셨다거나 그 외에 살아갈 달리 방도가 따로 있었으리라고 추정하지 마십시오.

삶 속에서 이것처럼 분명한 것도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굶주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파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울은 내가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면서 자족함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장막 깁기 일을 하면서, 또 주님은 목수 일을 하시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갔고,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이들이었기에 채워주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원하는 많은 이들이 은연 중 주님이 가난하셨기에 교회와 사역자들도 모두 가난해야 한다는 막연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또 풍요를 추구하면 무조건 기복주의로 몰아댑니다. 이것은 세상은 늘 부해도 교회는 늘 가난해야 한다는 생각과도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주님은 그분의 교회가 풍요롭기를 원하십니다. 파울의 기도가 늘 그러했습니다. 단 교회가 그 풍요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개혁의 관건입니다. 개혁의 초점은 교회의 빈곤화가 아니라 교회 자원의 올바른 활성화에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