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이 따를 테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환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요" (맑 16:16,17 중략)
요사이 교계에서 심각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플로리다 등 특정 장소에서 갑자기 이적과 표징 등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그리로 죄다 몰려가는 현상입니다.
물론 그것이 순수하고 참되다면 성경적이지요.
문제는 불순한 배후와 과정과 동기가 발견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불순한 배후라면, 그 초자연적 현상이 성경적인 바탕이 아니라 기적 시행자와 측근, 관련자와 주변에 이상한 영들의 작용이 결부됐을 때를 주로 가리킵니다.
불순한 과정이란, 성경과는 거리가 먼, 금가루/금속니/번갯불 등 이상한 초자연현상이 나타날 때를 말합니다.
불순한 동기란, 기적 시행자는 순전히 하나님의 도구라는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 개인의 이름과 개인의 공적, 개인의 능력과 영예가 예수님보다 더 드러날 때를 말합니다. 즉 성삼위 하나님이 아닌 개인이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지요.
최근 플로리다 부흥의 타드 벤틀리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 신자들이 이런 데 쉽사리 빨려 들고 말려 드는 데는 한 가지 근본적인 중요한 원인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법칙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강력한 가능성의 도구로서의 성도 개인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사도 파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그 분 안에서 내게 아무 불가능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필리포 4:13).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에 대한 굳은 신뢰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뤄질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도 개인의 믿음으로 신유와 이적의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약속이지요.
절대주권사상에 길들여진 사람들 중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야 이뤄진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사실은 성경에 밝혀지고 약속된 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는 말이지요.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 기쁘신(즉 허용된) 뜻, 온전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개인을 향한 성령님의 뜻도 따로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경말씀의 바운더리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벗어나거나 초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곧 성령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분명히 신자 개인이 성령침례나 신유나 기타 초자연적인 이적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과 사도들, 초기 신자들이 권능사역의 시범을 보였을 리가 만무하지요.
성경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12:2b).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 즉 예수 크리스토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예들입니다(갈라티아서 3:7).
바꿔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시인하여 거듭난(로마서 10:9,10) 사람들에게는 믿는 그 순간부터 아브라함의 복이 분여되게끔 하나님이 약속해 놓으셨습니다(갈 3:8-14).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 내지 영적 건강, 아브라함의 정신적 건강, 아브라함의 육적인 건강, 아브라함이 누렸던 모든 범주의 웰빙과 풍요가 신자들에게 전수되도록 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걸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 결과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질환으로 고생하는 신자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 오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모든 사도들을 통해 병고침의 시범을 보이셨고 약속을 하셨고 우리가 건강과 치유의 혜택을 누리기를 진정 바라십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이 따를 테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환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오"라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이 대명의 일부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이 약속을 문자 그대로 믿어 드리질 않습니다.
그 대신 마치 주인을 좇는 충견처럼 기적을 시행하는 능력의 종들의 뒤만 졸졸 따라 다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따로 택하시어 특별한 신유은사자, 신유사역자, 권능사역자들을 쓰시기도 합니다. 초기 예루샬렘 교회가 박해를 받을 당시 사마리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신유와 이적 등 권능사역을 행한 필맆 집사가 그 단적인 본보기이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명사(名士)화 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추종'하라고 보내시는 게 아니지요. 그럴 경우 금새 사람이 신격화 되고 우상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초자연적 관행, 이적과 소위 예언, 능력 시행의 관행은 이런 결정적인 맹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환자들에게 거듭거듭 그대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했소 라고 선언하실 뿐더러 믿는 사람들에겐 이런 표징이 따르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은 약속이지요. 주님이 지키시지 못할 약속을 내놓으셨다면 그건 헛 약속이고 거짓 약속이지 신실한 약속이 아닐 터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에메트(진리/참됨/진실)의 하나님이십니다. 엘로히 아멘(참됨/신실!) 엘 에메트(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신약이라는 이름처럼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곧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참되며 성취와 이행이 보장된, 신실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거룩하고 전능한 이름을 내어 거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 당신의 맹세요 약속이요 보장이요 인장(seal)이요 도장이요 서명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신유는 오직 권능사역자들, 신유명사들만의 것입니까?
노! 신유는 모든 신자들의 것입니다.
이 시간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흔들림 없이 굳게 의지하고 입으로 시인하고 선언하기만 하면 병이 물러가게 돼 있습니다.
모든 질병은 율법의 저주(신명기 28:15-26, 15-68 참조)를 마귀가 대행하여 인간의 몸에 갖다 주는 외적이고 침해적인 요소입니다(욥 1:11-20, 2:3-8 참조).
어떤 분들은 입버릇처럼 "내 병은 내가 알아요"라며 마치 자신의 질병이 친구라도 되듯, 그것을 전유화/소유화 하고 아끼다시피 하는데 병은 아무리 내 몸에 오래 머물러 있어도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친구 삼을 존재가 따로 있지 질병은 결코 내 친구가 아니며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나의 적으로 '인격'화하고 의인화하여 꾸짖어 물리쳐야 합니다. 전능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이 떠날 것을 명령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전날밤 마르쿠스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몸소 강의하신 내용(요한복음 14-16장) 가운데는 말씀으로,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whatever!) 구하든지 이뤄지리라고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면 그분의 이름으로 어떤 것을 구해도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흔들림 없고 변함 없고 썩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질병은 어떻습니까? 질병은 예외입니까? 천만예요.
성령님이 지상에 오시고 난 뒤 사도들은 주님 말씀 그대로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더니 곳곳에서 이적과 표징, 은사와 기사(奇事)가 나타나고 환자가 고침을 받고 권능이 시행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복음 전파의 도구와 일환으로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 그렇게 성취됐습니다.
또한 주님의 동생인 사도 야코보는, 교회 장로들(원로/지도자)들을 불러 올리브 기름을 붓거나 바르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얔 5:14-16).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말은 환부나 상처에 직접 발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과 믿음의 접촉점의 상징으로서의 도유(塗油)입니다. 이 말대로 (식용유든, 향유든) 기름을 바르며 믿음으로 기도하면 환자가 낫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제 자신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안 믿으면 그만이고.
이처럼 성경엔 수많은 신유의 모범을 통해 신자 누구나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나을 수 있고 남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진리의 약속을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100% 보장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진리의 약속에 대한 실천과 이행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불신의 세대 가운데서 우리가 참 믿음을 보기가 쉽지 않지요.
형제님, 자매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100%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뭐가 두렵습니까? 뭐가 불안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나았음을 선언하십시오.
주님은 이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을 뿐더러 사형에 준한 채찍형도 따로 받으셨음을 우리는 기억하지요. 이중 극형이었습니다. 힘께나 쓰는 로마 병사들이 갈쿠리와 생선가시, 납방울 등이 달린 이 채찍으로 있는 힘껏 후려 갈기면 살갗은 물론 살점과 근육이 너덜너덜하게 마치 옷감 찢기듯 갈갈이 찢기고, 심지어 뼈까지 드러나는 치명상을 입거나 아예 그 자리에서 숨지는 처참한 형벌을 주님은 십자가 형에 앞서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남달리 일찍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왜 이 형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대언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분이 채찍에 맞아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이사야 53:5b) 사도 페트로도 이 진리를 확인해 줍니다(페트로A 2:24)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우기던데 왜 굳이 영적으로만 해석돼야 하는지 그 이유는 더불어 밝혀 주지 못하더군요. 그리고 왜 우리가 성경 자체가 아닌 신학적 해석에 묶여야 하는 것인가요?
주님이 채찍에 맞아 우리가 나음을 입었으면 병도 낫는 겁니다. 아니 2000년 전 주님이 "다 이뤘다"고 외치실 때 나은 것이 보장됐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돌아보고 선언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건 도깨비 방망이식 믿음이 아니라 말씀과 진리와 약속 그대로를 아멘으로 화답하는 믿음입니다.
신자는 누구나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신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신유은사자, 신유사역자, 권능사역자들도 성령께서 고르시고 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초점을 모으거나 명사가 될 생각을 말고 오로지 하나님과 크리스토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그런 길을 걸어 갔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 믿음대로 될지어다!"
티엘티 독자와 방문자 모두에게
주님의 진리 약속 그대로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유와 기타 필요한 표징과 이적의 혜택이
고루 나타나고 부어지길!
나자렡 주 예수 크리스토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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