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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저런 글

이겼다!


갑자기 셀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모처럼 단꿈(?) 같은 것을 꾸고 있다가 채 마무리를 못하고 아쉽게도 깨야만 했다.

친구 목회자(필명 '강한성'님)의 전화인데, 이름난 G모 식당 체인의 하나인 인근 동네의 'T'에서 만나 함께, 한국-그리스전 축구 경기를 보자는 거였다.
흠..축구라면 집에서 봐도 될 텐데 이른 아침부터 꽤 극성이다 했다가, 아침 밥도 먹고 축구도 보잔다니 "금강산도 식중경"이 괜찮은 듯 싶어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강한성님은 목회자 축구동호회..인가의 회원이라는 얘기도 들은 거 같다.

알고 보니, 딴 한식당들처럼 이 곳도 미리 미디어 같은 데다 홍보를 해 놓고 손님을 대거 동원하려고 작심한 곳이었다.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친구의 설레발에 서둘러 경기 약 40분 전 도착했지만, 아직은 한산했다. 직원들은 모두 붉은 셔츠차림으로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이 집 주메뉴의 하나인 설렁탕을 시켜 먹고 얼마간 기다리다가 이윽고 경기가 시작될 즈음, 반가운 친구 목회자 한 명이 더 나타나 같은 벤치에 앉아 조인했다.
일부 젊은이들은 붉은 셔츠에다 등엔 태극기 망토, 볼엔 태극마크, 머리 위엔 쌍뿔까지 '붉은 악마' 패션을 골고루 갖추고 시뻘건 기세로 등장하기도 했다. 포크가 갖춰진 식당이어선지 붉은 삼지창만 안 갖고 왔을 뿐. 

식당 측이 제공해 고객들 모두에게 나눠주는 셔츠는 모두 중간 사이즈로, 내겐 꽉 끼게 맞았지만 나보다 덩치가 큰 두 목회자는 안 맞다고 대신 아이들을 위해 챙겨 놓고 있었다. 그리스랑 더 맘이 통하는지(?) 우연히도 파란 옷차림인 두 목회자 곁에서 나만 '빨갱이'가 돼 있었다. "나는 '붉은 악마'가 아니라 빨강 천사야"라고, 두 거룩한 푸른 친구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한국 SBS 방송은 아까 잠시 맛만 보여준 건지, 공식 경기방송은 미국 채널로 나왔다.
한국 팀이 전반전 초두에 이정수가 혜성 같고 그림 같은 선제골을 날리자, 온 식당 안이 떠나갈 듯 폭풍 같은 고함소리와 작열하는 굉음 속에 모든 고객이 일제히 기립한 상태가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조그만 공 하나의 움직임에 온 세계가 한숨 짓고 환호작약하다 미쳐 간다더니 과연 과언이 아니구나 싶다.

태극전사들은 위력 있게 골대 위를 넘긴 '대포알'을 포함, 연신 화려한 킼을 날려 댔지만 '헛발질'이 잦았고, 좀체 기회를 못 만들던 그리스는 때로는 정확한 볼을 꽤 날리는 듯 했으나 그때마다 새 스프링보드처럼 팡팡 튀겨내는 새 세대 골키퍼 정성룡의 선방 앞에 맥을 못 추었다.

급기야 그리스 팀은 히스테리가 돋았는지 퀘세라 세라 내지 될 대로 되라, 갈 데로 가라 식 태클을 막 해 대니까, 여기저기서 이리저리 부딪쳐 희한하고 기묘한 자세로 나가 떨어져 잔디 위를 구르는 사람마다 죄다 코리아 팀원이었다.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올림핔에서 정정당당히 겨루고 정통 문화인답게 싸웠겠거늘, 그 후예들은 아무리 짜증나기로서니 어찌 이런 막 가기 행패를..?

식당 바로 뒤쪽엔 둥근 돔의 큼직한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 있어, 들리는 말인 즉 거기 사람들도 응원하면서 분위기에 젖어 있다는데, 기분이 과히 썩 좋진 않을 듯 싶었다. [ 나중에 듣자니 여기저기 시 곳곳의 응원석에서도 그리스계 시민들은 자국팀에 실망했는지 끝까지 못 견디고 일찌감치 자리를 뜨더라는 거 같았다. 그 기분을 이해하며..좀 안쓰런 생각이 들었다. ]

결국, 개 앞에 몰린 고양이처럼, 애타게 챈스를 노리며 만회를 엿보던 그리스 팀의 노력이 무위로 끝나고 후반전을 맞게 됐다.


식당 한 가운데서 아까부터 약간씩 쿵쿵 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 보며 뭔가 했더니, 나중엔 본격적으로 리듬을 타며 쿠궁쿵쿵 제대로 나는데, 한 사람이 커다란 철판인가를 북처럼 두들기는 소리여서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한국-일본 월드컵 때처럼, 번화가인 플러슁 동네 길거리였다면 장고/북/징/꽹과리 등도 나타날 법 한데, 여기선 그 정도까지는 준비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식당 안에선 일부 농악기 소리가 너무 시끄럽기도 하겠거니와.


연전에 새로 개설한 이 현대식 식당은 바른네모 공간 속에 계산대나 바, 주방 등이 모두 위/옆으로 횡 하니 열려 있어, 마침 직원들이 일하며 함께 관전하기도 좋은 구조였다. 뒤늦게 입구 쪽 테이블에서 부랴부랴 아침 식사를 끝낸 직원들은 경기 구경도 하랴, 음식도 나르랴, 홍보용 기념사진도 찍으랴 부산하게들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과 달리 자그마한 스크린이 벽에 걸려 있고, 화면도 좀 흐릿한 데다 음향 설비 같은 것도 전혀 없이 다만 텔레비전에서만 확대돼 나온 소리를 멀리 맞은 편 벽 아래 자리에서 들으며 지켜 보려니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 첫 경기를 한국이 이기고 있다는 데서 다들 환희의 공감대 속에 파묻혀, 얼굴마다 웃음이 넘실거린다.

햄스터 챗바퀴 돌 듯한 직장생활과 바쁜 가내 업무 등에만 시달리고 찌들렸다가 모처럼 통쾌한 폭소와 고함을 지르려니 스트레스 해소도 꽤 되는지, 이마 위의 굵은 주름살들도 자주 펴지는 모습들이다.

잠시 곁엣 친구들의 근황을 묻고 서로들 딴 삶 얘기들이 오가던 가운데..후반전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는 초입이던가.
또 다시 앗~ 하고 화면을 가르는 한국팀 박지성의 선제골이 터진 순간, 만장한 온 고객이 일제히 동시기립 하며 내지르는 함성이 온 천지의 우뢰와 벼락과 지구촌 모든 밀림 속 맹수들의 포효 소리를 한꺼번에 한데 합친 듯, 수 백 데시블이나 될 법하게 한참이나 귀청을 "멍 때리"는데, 그 수위와 열기는 한-일 월드컵 때를 능가하는 듯. 그 바람에 철판 북을 치던 사람도 한 번 더 칠 절호의 찬스를 놓친 모양이다. 박지성의 미소는 천만불 짜리였다.


쿤타르키스네 나르키스네 뭔 키스네 하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계 친구들이 벌써 두 '골'씩나 먹은 황당무인지경 속에서, 망연자실한 채 그지없는 낙담의 표정을 지으며 서로들 아쉬우나마 위로의 키스라도 나눌 듯한 생각이 여실히 떠올라 아득~해진다. 
하늘색 십자가에다 하늘색 줄무늬를 곁들인 깃발이 온 하늘과 함께 눈앞에서 그들의 골키퍼 옷색깔처럼 노랗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희비의 엇갈림은 양팀 감독들의 대조적인 얼굴 표정으로도 뚜렷했다.

올림핔 발상지로도 유명한, 위대한 고대 서구 문명국 출신의 투사들이 21세기 극동의 작은 한반도의 태극전사들 앞에서 한 골도 못 넣고 맥을 못 추다니..오호, 참으로 애제요 통제라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들의 과감하고 대담한 폭력성 태클만은 봐 줄 만 했다.

FIFA는..퓌~ 하고 날아드는 공을 퐈~ 하고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 오매~불망하던 16강은커녕 얼마 안 가 fi장fa장이 되고 만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첫 승리에 한껏 만족하는 환한 웃음 속에 서로들 작별인사를 나누고, 붉은 셔츠를 입은 채 주차장으로 향하는 주말의 발걸음들이 모처럼 가볍고 가뿐했다.
'허정무 호'의 16강 진출을 기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향후 경기야 어쨌건 이 첫 판 경기 하나 만으로도, 세계 속에 코리아의 빛과 힘과 격도 한결 상승할 성 싶다. 

그처럼, 아마도 내일, 주일 강단에 서는 한인 설교자들의 발걸음도 그다지 무겁진 않으리라 생각됐다. 

정말 모처럼의 화끈한 한 판 경기였다.
축구 한 게임이 이렇게 기분을 좌우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