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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파울의 사도관과 명사관



파울의 사도관과 명사관
-신사도운동과 교계 명사들을 경계하며

오늘날 교계에서 '사도'나 '대언자'(예언자/선지자)로 자처 또는 자임하고 서로를 그렇게 높여주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갑니다. 심지어 사도학교, 예언자학교,엘리야 운동까지 등장해 그런 자칭 사도와 예언자들을 양산해 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으로 바람직한 풍조일까요? 우선 성경적으로 어디까지 맞나 봅시다. 교회엔 분명히 초기부터 사도/대언자/교사/목회자/전도자 등 5대 사역기능이 있어 왔습니다(에페소 4:11). 교회의 사역기능 내지 사역은사는 이뿐 아니라 권능자/방언자/신유자/도우미/치리자 등도 있습니다(코린토A 12:28).

그러므로 이중 어떤 것만 현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학자들이야 어떻게 주장하든 간에, 사도나 대언자들이 교사/목회자/전도자..등과 함께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듯 사도/대언자가 현대교회에 "없다"고 치면, (신학교 교수를 포함한) 교사/목회자/전도자도 당연히 있을 수 "없다"고 쳐야 공평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현대 교회에 출몰해 있는 자칭 사도/대언자들의 정격성 여부입니다. 특히나 소위 '신사도개혁운동'(NAR)을 통해 양산되고 있는 신사도들과 신대언자들을 검증해 봐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대두됩니다.

이 의문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초기교회의 대표적인 사도였던 파울의 견해로 돌아가 봐야 할 것입니다.

파울은 당대의 사도들과 교계 명사들에 대하여 매우 초탈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갈라티아 1:17-19, 2:1,2,6-9). 즉 그들을 배척하거나 경원하지도 않고, 추종하거나 과대히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대선배격인 그들이 잘못할 때는 가차없이 꾸짖기도 했습니다(갈 2:11-14).
오늘날 신사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봅니까? 특히 교계 인사들의 명사화나 신격화 따위의 기미는 파울에게서 찾아 보려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 현대 교계의 명사나 신사도, 신대언자들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파울은 우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경고합니다.
특히 코린토 교우들은 외모만 보는 성향이 강했지요. 그래서 겉모습과 외적 조건이 근사한 사람들의 말은 귀가 솔깃하여 쉽게 들어주곤 했습니다((코린토B 10:7, 11:3,4). 그런 성향을 적극 이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자화자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10:12,17). 스스로 자신을 헤아리고 스스로 자신을 비교하며 분수 밖의 자랑을 마구 해 대는, 슬기 없는 사람들이죠(10:13,15).

'얼짱', '몸짱'들을 한껏 추켜주는 현대도 물론 그렇지만 당대 교인들도 흔히 외모로 사람을 취하고 차별대우 하는 악습이 있었습니다(야코보 2:1-9). 여기서 '외모'란 명사의 허우대와 얼굴 등 신체와 용모 뿐 아니라 말 주변, 학력/경력/재력/권력, 인맥과 학맥 등 온갖 배경과 보유사항 등 다양한 외적 조건들도 포함됩니다.
오늘날 번듯한 외적 조건을 갖춘 교계인사들이 주로 명사로 뜨는 현상은 현대교회가 파울의 교훈을 잊어먹어 가는 중요한 조짐으로 보입니다.

파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크리스토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겸손히 자임합니다(코A 1:1). 반면 현대 교계 명사들과 신 사도/대언자들은 스스로, 사람의 뜻대로, 어젠다에 따라 자임하면서도 저마다 위로부터 초자연적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파울이 경계한 코린토교회의 분쟁은 바로 명사 추앙 풍조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마치 유행이나 탄 듯 생각과 입맛 대로 당대의 명사를 하나씩 골라잡아, '파울 파', '케파(사도 페트로) 파, '아폴로(에페소 교회 초기 목회자) 파', 심지어 '(예수) 크리스토 파' 등 색깔과 분파를 이뤄 서로 자신들이 참 유파인 양 뻗대고 경쟁하며 서로 질시했지요(코A 1:11-13, 3:4 참조).
 
이게 바로 명사주의의 결과입니다!

현대 교회도 그 못지 않게 베스트셀러 저자/강사들을 교계 명사로 받들며 그들의 영성과 사상을 마구잡이로 수용하고 추앙하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명사들 대다수가 미국 교계 인사들이고 보면, 일종의 사대주의라고도 할 수 있지요.

파울은 그런 분파주의, 명사주의를 가리켜 훌륭하다거나 바람직한 영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쟁하는 사람들, 육에 속한 사람들, 어린아기 같은 사람들, 육에 속하여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코A 3:1-3).
바로 이 점을 현대교인들은 크게 혼동하고 있습니다. 교계 명사를 따르고 그 영성과 사상을 마치 아기가 엄마 젖을 빨듯 정신 없이 주입 받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 신령하다느니 더 영적이라느니 더 참되다느니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이에 관하여 파울은 변두리적 요소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말의 슬기가 아닌 크리스토의 십자가를 전파한다고 사역취지를 밝힙니다.
그는 묻습니다. 현인과 선비, 철학자가 누구며 어디 있는지를. 그러면서 하나님이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하나님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파울의 사명이요 입장이었습니다.

세상엔 번드레한 외적 조건, 슬기와 실력, 문벌 좋은 사람이 흔하면서도, 교계엔 그다지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향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교계에도 잘 난 사람, "잘 나가는" 사람, (돈이나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활개 치며 인기를 끌어 명사로 뜨는 성향이 노골적입니다. 그런 것 자체가 잘못이라기보다는 더욱 그러길 추구하면서 사실상 조건 없이 향유하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란 뻑적지근한 재담과 위트와 재치가 번득이는 현란한 유머를 구사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홀딱 사로잡으면서 명사로 "방방" 뜨는 교계 인사들..과연 파울의 교훈을 구현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필칭 "거듭났다"면서, 남달리 빼어난 얼굴과 몸매의 미모를 앞세워, 반라 내지 거의 전라인 초미니/초비키니 차림으로 뭇 대중 앞에 활짝 웃고 나서서 눈요기(?)를 잔뜩 시켜주면서, 아름다운 창조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어거지 주장을 펴고 그것을 교계 미디어가 덩달아 북 쳐주고 장고를 쳐 주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다 뒤늦게 자살소동 같은 것이라도 나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격으로 신자 망신, 교회 망신, 교계 망신이 절로 이뤄집니다. 이게 진리의 현장인가요..?   

하나님의 입장은 되레 반대지요!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귀한 것들, 존대받는 것들,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 그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이상 코A 1:26-29 참조).

파울은 코린토 교인들을 만나고 대할 때, 멋들어진 말과 번득이는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했습니다. 그에겐 외모적인 강점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말 주변도 없고(코B 11:6 참조) 대머리에다 거의 추남 내지 면추남이었다고 하지요. 육적으로는 '마이너스' 조건이 충만한 상황이었지요(갈5:13,14 참조).
역설적으로..바로 그랬기에 그는 외적 조건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히브리 명문가인 고대 벤야민-샤울 가문 출신에다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로마 시민권을 지녔다는 강점도 있어 가끔 활용도 했지만 실상 그 역시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씨를 심는 자와 물 주는 사람 비유를 통해 파울이나 아폴로가 섬김이 밖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라고 역설합니다(코A 3:5-7).
'명사'로 자임하거나 사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마지막날 자신들이 집터 위에 금/은/흙/짚 등으로 쌓아올린 공력을 이글거리며 타는 검증의 불길에다 테스트 받아 봐야 합니다. 세운 공력이 불 가운데도 남으면 그는 상을 받고 불 타 버리면 구원은 간신히 받아도 해를 입게 됩니다(3:13-17).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명사로 자임하면서 자기 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파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라도 사람들을 자랑하지 마시오..파울이나 아폴로나 케파나 세계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다 여러분의 것, 여러분은 크리스토의 것, 크리스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3:21-23). 

우리는 누구나 섬기는 사람, 낮아져야 할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저자들, 교계 영성권, 신사도운동권 사람들을 보면 서로 유명해지길 원하고 서로를 자랑하고 추켜 세워 신격화하고, 인기를 타고 세상 풍조에 편승하고, 세상 시스템에 깊이 뿌리/말뚝 박기를 태연히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파울을 보십시오.
파울은 스스로 자책거리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며 자신을 판단할 이는 주님 뿐이라고 고백합니다(4:4).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시기까지 섣불리 판단하거나 사람을 자랑하고 지나치게 칭찬하지 말아야 합니다(4:5). 어둠 속에 감춰진 것들, 마음의 깊은 뜻이 심판과 규명의 빛 아래 훤히 드러나고 밝혀지기 까지는. 신사도운동권 사람들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4:6 중). 신사도운동권 사람들을 보면, 온갖 예언과 서로를 위한 찬사를 똥기고 남발하되 성경말씀 진리의 선을 넘나들며 성구를 적당히 이용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자연히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선이 하리망당해집니다. 
파울은 분명히 경계합니다.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다 보면 서로 교만하여 서로를 대적하게 된다고(4:6 하).

사도들이 누구였습니까? 초기 사도들이 과연 어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죽이시려고 작정한 사람들처럼 맨 끄트머리에 두셨기에 온 세상의 구경거리가 됐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약하고 낮아지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손수 일을 하고 수욕과 박대/학대를 당하고 비방을 당하다 못해 세상의 더러움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됐습니다(4:9-13).  

그러나 요즘 신사도들은 외적으로 온갖 좋은 조건들을 쌓아 올리며, 마치 교계는 물론 세상의 모든 영적 권능과 권세를 다 손아귀에 쥔 듯 행동하고, 비스름한 진리 또는 거짓 진리와 비진리로써 성도들을 호려 인기와 영예, 명성과 재물을 누리며 명사로서 살아 갑니다.
또 온갖 영성그룹끼리 거대한 연결고리를 이뤄 서로 조직적으로 돕고 연계해 나가면 뭐든지 다 굴러 들어오는 듯 보입니다. 그러기에 C.P. 왜그너 같은 사람은 교회에 돈이 왕창 굴러 들어오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고 개탄하듯 부르짖습니다. 

물론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가 누리는 것은 성경에 약속된 사항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과 야합해 명성과 영달을 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 사도, 신 대언자들은 주권운동권 등 세상 시스템과 연계돼 있는 것이, 하나님의 왕국을 땅에 이뤄 온갖 것을 누려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현실세계, 세상 왕국의 임금과 신이 바로 마귀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거나 모르고 지냅니다(코B 4:4). 그런 정신 없는 신사도운동권 사람들 때문에 요즘 들어 부쩍 입이 째지게 박장대소하고 희희낙락하는 존재가 바로 싸탄 자신과 그 종졸들이랍니다!

더구나 신사도들은 마치 자기네만 신령한 참 종, 참 사역자인 듯 행세하고 다니지요.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기성교회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자기네 교회에만 참된 영성과 구원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지요. 

파울은 계속 말합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던가요? 사도가 아니던가요? 내가 예수-우리 주님을 안 봤던가요? 주님 안에서 행한 나의 일(열매)이 곧 여러분이 아닌가요? 남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겐 내가 사도입니다. 내가 사도라고 주님 안에서 도장 찍은 사람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코A 9:1,2)

그러면서 파울이 사도가 아닌 양, 엉터리 사도인 양 거짓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묻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나요? 다른 사도들과 (야코보/유다 등) 주님의 형제들, 케파처럼 자매인 아내와  동행할 권리가 없겠나요? 하필 나와 바르나바스만 노동하지 않을 권한이 없나요? 누가 제 돈 써 가며 용병을 다니나요? 누가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안 먹겠나요?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젖을 먹지 않겠나요?..(중략)..우리가 여러분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는데 여러분의 육의 것을 우리가 거둔대도 지나치다 하겠습니까? (9:4-7,11)

다른 사도들도 그런 권한을 가졌다면 파울과 일행은 왜 안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어떤 사도와 종도 차별대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파울은 일부러 그런 권한/권리를 전혀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다고 했습니다(코A 9:12,15). 복음전파에 자칫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런 설명문을 쓰는 것 자체도 "그처럼 해 달라"는 게 아니라..차라리 자신이 죽을지언정 자랑을 부질 없는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복음을 전해도 자랑할 게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파울에게 상급이 있다면 뭘까요? 바로 복음을 대가 없이 전하고 자신의 권한을 다 쓰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풀이합니다. 스스로 섬기는 자, 노예가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9:16-18 참조).  
그런데 과연 오늘날 신사도들이 그럽니까? 파울의 이런 점을 다만 한 조각이라도 본받으려 합니까? 아마도 정반대 모습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신사도가 아무리 진짜 사도/대언자라고 해도 그들의 거드름과 독선적 자임 행위는 정당한 근거가 서질 않습니다. 그들의 방대한 조직/체계/브리지가 곧 선과 의, 하나님의 왕국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들이 썩는 면류관을 얻을지 생명의 금관을 얻을지는 두고 봐야 압니다만, 그들의 열매와 뿌리가 이상하면 그 종국도 뻔할 것입니다.

파울은 모든 것이 가해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가해도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조적으로 신사도운동을 보면, 모든 것이 가하니 모든 것이 다 유익하고 모든 것이 가하니 모든 것이 덕된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왕국과 주권을 땅에 이룬다는 명목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 세상 시스템도 가리지 않고 모두 활용하기 때문이죠.

신사도운동 사람들은 이런저런 명사들을 불러 데려다 놓고 자신과 서로를 추천해 주고 서로를 추켜 세우고 서로가 높여 주고 마침내 서로 신격화 해 줍니다. 겉으로는 보기 좋아도 숨은 어젠다와 목표가 있지요. 
그러나 파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스스로 추천하길 시작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딴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여러분에게 부치거나 맡겠습니까? 여러분이 곧 우리의 편지(추천서)입니다..! (코B 3:1,2)

파울은 또 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않고 오직 진리만 나타낸다고 했습니다(위 4:2). 그렇게 사람들의 양심 앞에 나타낸 진리 자체가 곧 자신들의 천거 내용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뭘 말해 주나요?: 명성 아닌 진리가 곧 우리를 천거해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사도운동권은 초기 교회 사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혼동시키고 혼탁하게 하는 걸 예사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네 어젠다에 이용하느라 이리저리 적당히 갖다 붙이면서, 제 맘과 제멋대로, 제 입맛대로 해석들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되레 자기네가 영적 분별력이 탁월한 것처럼, 다른 교계 사람들에겐 아예 분별력이 없는 것처럼 내세우고 행세들을 하니 가관입니다.

파울은 두려우신 주님 안에서 사람들에게 권하길, 재차 코린토 교우들에게 자천하는 게 아니라 오직 교우들을 통해 자긍할 기회를 주어 마음 아닌 외모로 자랑해온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5:12).

그리고 사도를 비롯한 교회의 모든 직책의 궁극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크리스토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데 있습니다(5:18-21).

파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이 직책을 지탱하고 감당하느라..이런(코B 6:3-10 참조) 삶을 살았습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 파울은 믿지 않은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즉 빛과 어둠, 크리스토와 벨리알, 신자와 비신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고 상관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6:14-17).

그러나 오늘날 신사도운동권의 향방과 행태는 이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7권역 정복운동을 통해 할 수 있는 한 세상과 아울리고 '조화'되려고 애쓰면서 운동을 발전시켜 나아갑니다. 왜그너의 행동거지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자신을 성별하지 않고 부정한 것을 마구 만지는 그런 행태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과는 반대 방향입니다(6:16-18).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요복 3:16)는 것만 알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함(요서A 1:15-17, 요복 3:19 참조)은 모르고 지냅니다. 

그들은 사랑만 유달리 강조했지, 상대적으로 진리를 강조하진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난히 사랑을 강조하는 그들이 그들에 대한 바른 비평은 적극 대적/거부/배척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기가 어렵지요. 우리는 신사도운동권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지만, 그들 식의 영성, 사상과 행동은 본받을 수가 없습니다.

입이 닳도록 되뇌지만, 진리와 사랑은 늘 함께 갑니다. 사랑 따로, 진리 따로는 아닙니다.

오늘날 온갖 영성과 영성훈련을 유난히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고 숱한 비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딴 교훈을 말하면서, 바른 말 곧 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온갖 영성 이론을 주워 섬기며 마음이 부패해져 진리를 잃은 나머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깁니다(티모테A 6:3-5 참조). 영성을 이익의 재료로 이용한다는 거지요.

파울-티모테 당시에도 이교 신화와 전설, 끝도 없는 족보 따위에 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티모테A 1:4), 오늘날 현대 영성 속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찾게 됩니다. 글벗들과 함께 온갖 중세/북구 신화에 심취하고 탐닉했던 C.S. 루이스가 그랬고, 아터 왕과 마검, 원탁회의와 기사들, '성배' 따위의 전설에 몰입해온 캔저스시티예언그룹이 그런 사례입니다.

그런 것을 따를수록, 하나님은 미혹의 영을 그들 가운데 두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십니다. 진리 대신 비진리와 불의를 즐기는 모든 사람들로 심판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테살로니카B 2:11,12).
 
우리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와 전설, 철학과 헛된 이론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콜로새 2:8, 티모테A 4:7). 범사에 잘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마땅합니다(테살A 5:21,22).  

파울을 비롯한 참 사도들은 어느 때라도 사람들 앞에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테살A 1:5). 사람들로부터 존중과 영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1:6). 신사도운동권 사람들과는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고 아니할 수 없지요. 어떤 신사도운동권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면 제 잘 난 맛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곤 하는 건 저만인가요.  

오늘날 신사도운동과 직결된 관상영성은 어떤가요?
이런 유의 영성에 대하여 파울은 미리 앞서 경고한 바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와 세상 초등학문을 좇는 것입니다. 즉 일부러 하는 겸손, 천사/성화상/마리아 숭배, 육체의 마음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기, 자의적 숭배, 몸 괴롭히기 등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 따르기요 마음의 할례가 아닙니다(이상 콜 2:8,18,23 참조).

파울의 말을 빌려 경고하건대..싸탄도 빛난 천사로 가장하고 그 일꾼들도 짐짓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꾼들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고 잡아먹히고 호되게 '뺨'까지 맞고도 관대하게 용납하고 관용하는 것이 현대 교계입니다. 믿음으로부터 떠나 미혹의 영들과 악령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입니다.
옳다고 인정 받을 사람은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칭찬해 주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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