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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번영을 누리신 예수님


오늘날 '형통신학', '번영신학'이란 꼬리표를 달아 성도를 단죄하는 교계 그룹이 있다.

유사 이래 유례 없는 한국교회의 성장이 형통과 번영의 길을 걸어왔고 혜택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인데..이젠 인위적인 부흥/회개운동도 여의치 못하고 답보상태에 이르자..원인을 거꾸로 돌리면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 한국 교계와..나아가서 전체 한국인들 다수가 선조의 신앙 덕분에 너무나 잘 살아 왔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번영과 잘됨은 언제나 영/혼/육의 잘됨 즉 영적 풍요와 함께, 건강 및 물질과 연계돼 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절반 이상이 재정과 물질에 관한 것이다.

앞서 그런 주장자들은 축복/축도 따위를 하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 완전히 100% 축복권 밖으로 떠나 있어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축복권 아니면 100% 저주권일 뿐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과 소속 교회가 맨날 일이 꼬이고 잘 안 풀리고 안 되길 기도하거나 바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입장과 말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인들에겐 맨날 복 아닌 저주만 퍼 붜야 그런 주장을 할 자격이 있다! 논리적으로 그게 맞다.

복/형통/번영을 끝내 부정하거나 거부할 사람들은 교계를 떠나야 한다! 그들은 형통과 번영과 잘됨이 아닌, 순전히 자신의 힘과 노력, 세속의 힘, 세상의 방편으로만 살아가야 자기 발언을 합리화 할 수 있다. 풍요나 형통/번영이 악덕이고 가난이 '미덕'이라면, 자신들이 몸소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풍요/형통/번영을 누리거나 추구하는 교회로부터 녹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마치 구약 성도만 번영/형통을 누렸을 뿐, 예수님과 사도들이 번영/형통과는 전혀 무관한 듯 말하곤 한다. 마치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난과 저주, 비 번영, 비 형통, 금욕주의적인 빈천한 삶을 살았다고 착각하곤 한다 .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사도 요한은 번영/형통/잘됨을 말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모범이신 주님을 한 번 살펴 보자.
주님은 과연 우리 생각처럼 가난하셨는가?

물론 주님은 하늘 풍요를 놔 두시고 떠나서, 하늘 차원에서 볼 때 가난한, 한 인간으로 오셨다. 우선 빈 손, 빈 몸으로 오셨다. 왜 그랬나? 바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그러나 주님이 세상적 차원에서 가난하셨는지..우리 한 번 살펴 보도록 하자.
주님께서 가난의 모범을 보이시련다면, '째지게', "찢어지게" 가난해야 가장 모범일 것이다.

물론 주님은 처음에 가난한 가정에 오셨음이 분명하다. 마리아/요셒 부부가 근본적으로 "지체높은" 다빋(=다윗) 왕손이었음에도 불구, 예수님의 할례를 행하고 정결례 제물을 바칠 때도 소나 양을 못 드려 산비둘기 한 쌍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미래 삶을 위해서도 이 가정이 가난에서 벗어나길 바라셨다. 왜냐고? 하나님은 풍요의 하나님이지, 가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가난의 신은 싸탄-그 자다. 인간에게 가난과 온갖 저주를 갖다주고 퍼붜 주는 '신'은 마귀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신자들을, 죄는 물론 죄의 저주 패키지의 일부인 가난에서도 벗어나게 해 주시러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은 가난한 마리아/요셒과 아기 예수의 가정을 위해 머나먼 동방에서 도우미들을 부르셨다. 풍요를 누리던 동방의 현인들이다. 그들은 낙타(또는 말/나귀)에다 보배합을 싣고 왔다. '보배합'이란 말은 왕궁 등에서 쓰이는 큼직한 상자를 뜻하지, '눈꼽' 만큼 또는 '코딱지' 만큼의 보물을 달랑 담아 와 생색을 낸, 작은 상자가 아니다. 

즉 동방박사들은 가난한 민가의 아기가 아닌, 한 왕국의 왕궁에 사는 왕을 경배할 것을 예상하고 왔기에, 큼직한 황금덩이와 다량의 유향, 몰약 등 당대 군주/왕족/귀족들에게 걸맞은 보물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님과 별의 인도를 받아 자신들이 찾아 헤맨 참 유대 왕은 화려한 왕궁에 있지 않고 가난한 나자렡 집안의 아기임을 알고 난 현인들은 가져 온 예물을 유감 없이 기꺼이 바쳤다.

뭘 시사하는가? 아기 예수님 가정은 졸지에 나자렡 동네의 한 갑부가 됐다는 뜻이다!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성령님이다! 이건 깊은 영적 지식이 없어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상상과 추리가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다수 신자들은 한사코 예수님과 가족이 일평생 찢어지게 면걸(免乞) 생활을 했다고들 착각하고 있다. 카톨맄 수도원에서 온 사상이다. 놀랍게도 그런 '면걸' 교훈을 가르쳐 온 바티칸 교황청은 지상 최고의 거부의 하나다! 물론 말씀을 통한 풍요와는 거리가 멀지만. 

요셒은 이 보물을 팔아 가업을 일으킨다. 그래서 명장 목수가 된다. 그는 나자렡 뿐 아니라 주변 동네에서도 널리 알려진 목수였다.
그와 마리아 부부는 나날이 삶의 여유가 생기자, 여러 자녀들을 둔다. 성령으로 잉태돼 태어난 맏아들 예슈아(=예수) 외에도 이아콥(=야코보)/쉬몬/요셒/예후다(=유다) 등의 아들이 태났고 딸도 최소한 둘을 낳았다. 최소 9명의 대가족이었다. 

맏아들 예슈아도 아버지를 도와 약 20년간 가업에 힘썼고 혹시 요셒 만 한 명장은 아니었을지언정 그 못지 않은 목수로서 성실히 노동을 했다. 바로 그래서 아버지 요셒이 비교적 일찍 죽고 나서도 가정을 꾸려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맏형 예슈아가 공사역에 나섰을 때 동생들을 비롯한 집안은 잘 이해하질 못했다.  
동생들은 누구보다 예슈아를 메시아/구주로 믿지를 않았다! 마리아와 아들 형제들은 한 때 예슈아를 살짝 돈 미치광이 정도로 알았다. 예슈아를 다시 집안에다 붙잡아 두려 했다. 목수 일이라도 다시 하라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예슈아가 카페르나움에 일종의 초기 사역기지에 해당하는 임시 거처를 마련했을 때, 몇몇 제자들이 그곳을 방문했다. 제자들이 방문해 보자 거적대기를 깐 냄새 나고, 찢어지게 가난한 노숙자/홈리스 차원과 스타일의 집이 아니라 아담했고..함께 여럿이 기거할 만한 장소였다. 

예슈아와 열 두 제자들이 훈련과 공사역을 할 때도 그들은 굶어 가며 찌들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지 않았다. 13명은 돈을 휴대했기에 점심도 사 먹을 수 있었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주며 살았다. 자고로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도울 수 있다. 없는 데 어떻게 없는 자를 돕는가? 쓰고 여분이 있기에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12제자들이 맨날 무위도식을 하면서, 길가에서 구걸하거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며 살았다고 믿는 것은 그야 말로 소설도 아닌 우스운 공상과 신화에 불과하다. 그들의 배후엔 수시로 가산을 바치거나 팔아서 사역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풍요는 다양한 차원이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는 차원으로 오기도 한다.

문제는 가난을 '미덕'이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그런 착각은 동양적/유교적/수도원적이다.

고대의 현인 아구르가 나를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마소서 라고 한 것..
사도 파울이 나는 가난에도 풍요에도 머물 수 있다고 고백한 것..
이것은 [가난=미덕]이란 공식을 합리화 해 주는 발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주님의 복을 받아 형통/번영/복/풍요를 누려 왔다.
이조시대 말기 즉 한국교회 초기의 찌들어진 가난은 이제 찾아 볼 수 없다.  
복음 즉 복된 소리를 통해서 주님께 복 받은 결과다.
이제 와서 형통/번영/복과 풍요가 마치 악덕인 양 주장되는 것은 배부른 징조다.

문제는 받은 바 복과 풍요를 나누지 않아서인 것이다. 한국 교회는 받고 누리는 바 형통/번영/복과 풍요를 올바로 써야 한다. 구호와 나눔에 더 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약하고 작은 교회, 없는 자들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은행계좌나 불리고, 축적하고, 근사한 건물이나 짓고 이름이나 드러내는 '선교' 사업에만 쓰려다간 현대의 바벨탑이 되고 만다. 초기 교회 정신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형통/번영/복/풍요를 올바로 나눠 쓰지 못하니까 비판과 욕도 얻어 먹고..
더 나아가 마치 유교적인 [가난=미덕] 공식이 교계에도 파고 들고..
형통/번영/복/풍요는 하나님 아닌 마귀로부터 온 것인 양 떠드는 목청도 생기는 것이다.

형통/번영/풍요와 복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뜻이었다! 창세기 1:28, 8:17, 9:1을 보라! 하나님이 번영과 복을 비셨는가, 아니면 저주를 퍼 부으셨는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창조주이셨고, 창조에 참여하신 로고스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가난이 미덕이라면, 아브라함/이짜크/야콥은 당연히 찢어지게 가난한 걸인 생활을 했어야 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 터이다.

주님은 스스로 저주를 받으셔서 가난해지셨다.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갈라티아 3:10,13-14)!

교회가 가난이 미덕이랍시고 풍요와 번영, 형통과 잘됨이 없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면..
어떻게 주님의 사역을 할 수나 있으리요! 맨날 초자연적 이적으로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친교실의 밥과 반찬도, 빵도 하늘에서 떨어뜨려 주기만 기대하고 위를 바라 봐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번영/풍요/복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목청을 높일 것이라면.. 되도록 기독교 밖으로 떠나 주길 바란다. 아니면 성경 말씀대로 믿든가.

사랑하는 님.
님의 영이 잘 되듯
님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시길!

(사도/장로 요한이 가이우스에게)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겐 당연히 복을 빌고, 범사가 잘 되고 번영하고 형통하길 비는 것이 신자 즉 믿는 사람들의 도리다. 신자나 교회가 복 되지 않고 잘 안 되고 번영/형통이 안 되길 바라는 것은 불신이고 나쁜 생각이다. 그렇다면..선한 우리는 마땅히 번영과 형통을 믿어야 하고, 말씀을 따라 믿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이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티엘티 독자들 모두의 복과 번영, 형통과, 잘됨과 건강/장수,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비는 맘,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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