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셒 스밑의 첫 아내 에마 헤일과 넷째 아내 루이사 베이먼
몰몬교와 일부다처 (3)
- 조셒 스밑의 아내들
웹을 보면, 몰몬교 창설교주(초대수장) 조셒 스밑( 조셉 스미스 ) 2세의 일부다처 실행 여부 이슈를 놓고, 상반된 견해들이 대립해 있다.
한 쪽은 스밑이 (원) 몰몬교의 일부다처를 시작했다는 견해, 다른 한 쪽은 스밑이 일부다처제와 싸운 반면, 제2대 수장 브리검 영이 시작했다는 견해다. 후자는 스밑의 아들 조셒 스밑 3세가 세운 '개편 몰몬교'(RLDS)의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위의 전자와 후자, 어느 쪽이 맞을까? 후자는 눈 가리고 아웅 격이다. 역사는 역사로 놔 두고 밝혀야 정직하다. 역사는 덮고 가리려야 필경은 할 수 없다. 열매와 결과가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스밑이 일부다처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다음 물음들이 뜨게 된다.
• 왜 조셒 스밑은 일부다처의 '계시'를 받았고, 첫 아내 에마에게 그에 대한 복종 역시 '계시'로 요구한 흔적이 있는가? 어떻게 그 '계시'들이 추후 '교리성약서'에 기재됐는가?
• 주류 몰몬교인 LDS를 비주류로 취급하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현재의 근본주의 몰몬교(FLDS)는 왜 일부다처를 꾸준히 지지하고 실천해 왔는가?
• 브리검 영은 왜 돌연 일부다처를 시작하여 50여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아내를 두었는가?
• 영 말고도 왜 수많은 몰몬 지도자들이 일부다처를 했는가?
• 왜 스밑의 아내였다는 수많은 여인들의 이름들과 옛 증언들이 웹에 꾸준히 나도는가? 그중 다수는 생생하고 실감 나는 체험으로 기록돼 있는데, 모두 꾸민 얘기들이라는 말인가?
• 스밑은 왜 노부 시장 당시 '노부 익스파지터' 신문을 폐쇄해 버렸고 로우 변호사 등은 왜 스밑이 자기 아내를 앗으려 했다고 지상에 폭로했는가?
• 스밑이 일부다처를 하지 않았다면, 신('하나님')에게서 받은 일부다처 계시를 묵살하고 실천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 왜 몰몬교리 가운데는 미래 '낙원'/'천국'에서의 일부다처를 이상적인 교리로 삼고 있는가?
스밑이 일부다처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스밑의 아내들
스밑은 1833년부터 일부다처를 시작했고 모두 33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유력설이 있어 왔다. 물론 일부 몰몬교측의 반론도 있고, 심지어 '44 명' 설도 있다. 사실이라면, 여기서 웬지 '33'이란 숫자에 주목하게 된다. 프리메이슨리에서 신성시하는 수인 데다 스밑 자신, 매스터메이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정일 뿐이다.
[ 괄호 속은 결혼 연도, 월, /당시 나이/기혼남편 ]
에마 헤일 (1827 /22세)
패니 앨저 (1833* /16)
루신다 모건 해리스 (1838, /37/조지 해리스)
루이사 베이먼 (1841.4 /26)
자이너 헌팅턴 제이콥스 (1841,10 /20/헨리 제이콥스)
프리센디어 헌팅턴 뷰얼 (1841,12 /31/노먼 뷰얼)
애그니스 쿨브맅 (1842,1 /33)
실비아 세션스 라이언 (1842,2/23/윈저 라이언)
메리 롤린스 라이트너 (1842,2/23/애덤 라이트너)
패티 바틀맅 세션스 (1842,3/47/데이빋 세션스)
머린다 잔슨 하이드 (1842,4/27/오슨 하이드)
일리저벹 데이비스 더피 (1842,6/50/제이비즈 더피)
새러 킹즐리 클리블랜드 (1842,6/53/잔 클리블랜드)
델시나 잔슨 (1842,7/37)
엘리저 스노우 (1842,6/38)
새러 앤 휘트니 (1842,7/17)
마타 맼브라이드 나잍 (1842,8/37)
뤁 보즈 세이어스 (1843,2/33)
플로라 앤 우드웙 (1843 봄/16)
에밀리 다우 파트리지 (1843,3 /19)
엘리저 머리아 파트리지 (1843,3/22)
앨메러 잔슨 (1843,4 /30)
루시 워커 (1843,5 /17)
새러 로렌스 (1843,5 /17)
머리아 로렌스 (1843,5/19)
헬렌 마 킴볼 (1943,5/14)
해너 엘스 (1843 중간 / 29)
엘비라 코울즈 홈즈 (1843,6 /29)
로다 리처즈 (1843,6 /29)
데즈디모나 풀머 (1943,7 /32)
알리브 프로스트 (1843 중간 / 27)
멜리사 롵 (1843,9 /19)
낸시 윈체스터 (1843 /14)
패니 영 (1843,11 /56)
이상을 보면, 스밑은 가장 어리게는 14세의 소녀로부터 가장 나이가 많게는 58세까지 다양한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이들과 성생활도 했다. 33명 중 11명은 이미 남편을 둔 기혼녀였다!
이 사실에 대해 의심이 드는 독자는 다음 사이트 하단의 참고자료를 살펴 보면, 몰몬교 자체 자료도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첫 아내 에마 헤일
스밑의 첫 아내인 에마 헤일은 실로 조강지처였고, 그러다 보니 몸과 맘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훗날 그녀의 본명이 에마 헤일 스밑 비더몬이었다.
에마는 1804년 펜실베이니어주 서스쿼하나 카운티의 하머니 타운슆에서 아이쟄/일리저벹 루이스 헤일 부부의 일곱 째 아이로 태어났다.
조셒 스밑은 1825년 아이쟄 농장에서 지하 보물 찾기 일을 하면서 주인의 딸인 그녀를 만나 반했고, 아이쟄에게 두 번 졸랐으나 "자네는 (아직 낯선) 나그네"라고 거절하자, '27년 1월 17일 몰래 에마를 데리고 나가 주경계를 넘어 뉴욬주 사웉 베인브리지(앺튼)로 가서 법관 앞에서 결혼했다.
집을 떠날 당시 에마는 혼인 의사가 없었으나 그때까지 알던 어떤 청년보다 스밑과 하기로 맘 먹었다.
그해 9월 22일 당시 스밑의 친가가 있는 팰마이어러에서 살던 스밑 부부는 마차를 타고 현재 '쿠모라 언덕(힐 쿠모라)'라고 알려진 곳에서, '모로나이' 천사가 지시한 몰몬경 '황금판'들을 찾는다. 12월엔 하머니의 헤일가로 돌아오자 장인 아이쟄이 "넌 내 딸을 훔쳐 갔어"라고 분노했으나 얼마 후 화해하고 딸네를 도와 집과 농장을 장만하게 해 준다.
곧 정착하자 스밑은 아내를 필경사로 삼아 몰몬경 번역을 시작했다. 에마는 매일 여러 시간씩 스밑이 모자 속에 머리를 박은 채 몰몬경을 읽고 '번역'하여 불러주는 대로 받아 썼다. 그 와중인 1828년 6월 15일엔 사실상의 장남 '앨빈'을 낳았으나 불과 몇 시간만에 숨졌다.
'29년 5월엔 하머니를 떠나 뉴욬주 페이엩에 살면서 몰몬경 '번역'을 끝냈다. 1830년 4월 6일엔 스밑과 5명의 남자들이 '크리스토의 교회'란 것을 세웠다. (1838년 '예수크리스토의후기성도교회들의교회로 개칭)
에마는 그해 6월 28일 알리버 카우더리에게 침례를 받았으나 몇 주 후 스밑은 (유리를 통해 땅속의 보물을 발견한다고 주장하는 흔한 속임수인) '유리 보기'(glass looking)를 금한 펜주 법에 따라 사웉 베인브리지에서 체포/재판 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기간동안 맥빠진 그녀를 위해 스밑은 "불평하지 말라..그대의 죄가 용서받았고, 그대는 선택된 여사(elect lady)라..그대는 경전 주해자, 교회 권면자로 (스밑에게) 안수 받으리라.."면서 아울러 성스러운 찬송가들을 선곡할 권위를 부여한다는 내용의 위로 메시지를 받았다.
스밑 부부가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에서 몰몬교회(당시 이름: 크리스토의교회)를 이끌던 1831년, 그해 4월 30일 에마가 쌍둥이(태디어스/루이사)를 조산했으나 아기들이 몇 시간 후 숨져갔다. 이튿날(일설은 같은 날)은 초기 몰몬교도이자 훗날 초기 호주 포교사였던 잔 머닼의 아내 줄리아 역시 쌍둥이를 낳은 뒤 엄마가 죽었다. 9일쨰 되던 날 머닼은 자신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쌍둥이(조셒/줄리아)를 스밑 부부에게 입양시켰다. 1년 뒤 어린 조셒도 죽었다.
1832년 가을 에마는 또 다른 사내아기(조셒3세)를 낳았고 몇년 후 프레더맄을 낳았다.
1838년 교회가 운영하던 금융 시스템인 커틀랜드안보협회(KSS)의 실패로 소송과 분규 후 추방령을 받은 스밑은 1월 12일 ('계시'에 따라 '자이언' 곧 시온이라고 명명된 미주리로 혼자 향했고), 얼마 후 당시 5개월째 임신 중인 에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차로 800마일 길을 달려 오자마자 앨맄잰더를 낳았다.
그러나 미주리 주민들과 몰몬들 사이의 분규인 '몰몬 전쟁'으로 스밑이 항복/투옥된 끝에 강제퇴거령을 받고 1839년 2월, 당시 옥중에 있던 스밑을 두고 당시 임신 4개월('단 칼로스')이던 에마 혼자서 생후 8개월~7살까지 아이들 4명을 데리고 얼어붙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 일리노이 노부로 갔다. 스밑은 탈옥했다.
당시 맨션 하우스를 짓고 집 한 켠에서 에마가 여관을 운영했다. 1842년 3월 24일엔 교회 여성 자원자들에 의해 '숙녀들의 구호협회'(LRS)가 결성돼, 에마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노부 생활이 안정돼 가자, 스밑은 일부다처제의 정착을 시도하려 했다. 커틀랜드와 미주리에선 이리저리 생각만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1841~43년 사이에 30여 아내를 얻었는데, 그는 이를 비밀리에 했고 아내 에마에게도 숨겼다.
에마는 일부다처를 공공연히 규탄하는 캠페인에 참여해, '42년 여름 (자신을 포함한) 1000명 여성들의 서명을 받아서 스밑이 일부다처에 관여됐음을 부인하는 탄원서를 승인했고 10월엔 일부다처를 공식 부정하고 남편의 관여를 부인하는 증명서 발행을 LRS 회장 권한으로 재가했다.
그런 한편, 에마는 스밑이 "새롭고 영원한 언약인" 복수결혼 '계시'를 이유로 아내들을 추가로 더 얻으려 하자, 받아들이느라 고심했다.
다음은 몰몬교의 4대 경전의 하나인 '교리성약서'(D&C)의 '복수결혼' 관련 내용이다.
D&C 132:1 참으로, 주께서 말씀하시길..
D&C 132:4 ...누구라도 이 언약을 거부하고는 나의 영광에 들어오도록 허락될 수 없다.
D&C 132:52 "또한 나의 여종 에마 스밑은 내 종 조셒에게 주어진 그들 모두(아내들)를 받아 들이거라..
D&C 132:55 "그러나 만일 그녀가 이 계명에 안주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내가..그(조셒)에게 이 세상에서 백 배의..아내를 줄 것이다."
D&C 132:62 "또한 만약 그가 열 처녀들을 얻게 된다면, 간음할 수 없다."
D&C 132:64 "..만약 한 남자가 한 아내를 얻고..또 그녀에게 (이 복수결혼) 법을 가르치면..그녀는 남편을 믿고 조력할 것이요 그러지 않는다면, 멸망 당할 것이다..
에마는 조셒의 계시에 복종하여 처음엔 여러 후배 아내들을 집에 들이기까지 했지만, 얼마 후 주저하자 조셒은 이 아내들을 딴 곳에 살게 한다.
1844년 3월 20일, 에마는 '노부의 이웃'(NN)에 실린 '정절이 승리하리'란 글 속에 실린, '노부의 청순의 목청'이란 글에다 서명/발행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목청과 두 손을 높여 잔 C. 베넽의 '영적인 아내 제도'를 반대합니다. 그것은 여성들을 유혹하려는 난봉꾼들의 음모입니다. 그것을 되뇌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들의 탐욕과 이익을 위해 대중화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럽혀지지 않은 부부의 침대는 영예롭지만, 복수결혼, 중혼, 음란, 통간, 성매매는 진실한 남성들의 마음으로부터 내쫓겨 타락한 속성이라는 심해로 내던져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윌리엄 클레이튼은 1843년 8월 16일 이런 일기를 썼다.
"오늘 오전 조셒(스밑)이 나에게 말하길..'원리'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에마에게 그녀를 위해 모두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지만..그(스밑)는 나에게 아무 것도 포기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
1844년 6월 7일, 노부 시의 스밑 반대자들이 스밑의 일부다처를 알고 그와 이 교리를 비판한 신문 '노부 익스파지터'를 발행했다. 노부 시장 스밑이 의원이기도 한 시의회는 신문소 파괴령을 내렸고, 이 일로 스밑은 체포돼 카티지 교도소에 갇히며, 27일, 형 하이럼과 함께 약200명의 폭도들에게 암살된다.
에마는 11월 17일 유복자 데이빋 하이럼 스밑을 낳았다. 스밑은 교회의 피신탁인이기도 한 탓에, 그의 모든 부동산도 교회재정에 포함돼 한데 휘말리는 통에 유족은 장기간 큰 고통을 당했다.
마땅한 후계자도 없자, 우여곡절과 회중 표결 끝에 당시 쿼럼(몰몬 12사도회) 의장이던 브리검 영이 노부 신전의 사실상 대표가 됐다.
그러나 에마 및 스밑 가족, 에마의 친구들과 영 및 따르미들 사이에 갈등이 일고, 노부 주민들과도 충돌을 빚자, 영은 노부를 버리고 서부로 향한다.
노부에 남은 에마는 1847년 12월 23일 당시 친근했던 일리노이주 민병대 루이스 비더몬 소령(후에 대령)의 청혼을 받아 들여 재혼한다. 비더몬으로서는 3번째 결혼이었다.
그는 노부 시 평화법관, 즉결 판사로도 여러 번 선출됐다. 그는 여러 가지 벤처에도 힘을 쏟았다.
1860년 4월 6일, 그녀의 아들 조셒 스밑 3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아버지를 잇는 새 몰몬교의 수장이 되겠다고 나서,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교회를 조직했다('재편후기성도교회'/RLDS로는 1872년에 개칭. 후에는 '크리스토의 커뮤니티'로 재개칭). 나중엔 어머니에게 찬송가 편집도 요청했다. 에마는 스밑 시절부터 모두 3회에 걸쳐 찬송가를 편집/작사했다.
에마가 죽은 1879년, 비더몬은 과부였던 낸시 에이버크롬비와 결혼해 죽기까지 함께 살았다.
에마는 스밑 사후에도, 그가 일부다처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일부다처제를 반대했다. 자신이 조셒 스밑이 받았다고 몰몬들이 주장하는 일부다처 계시를 알게 된 것은 오슨 프랱의 책 '선견자'(1853년)를 읽고 나서였다고 주장했다.
미국 사가 린다 킹 뉴얼과 밸린 에이버리는 공저 '몰몬 수수께끼: 에마 헤일 스밑'(1984년)에서 에마가 스밑 생시에 여러 번 복수결혼을 증언/목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에마는 생시에 이렇게 말했다.
"내 남편의 죽음 전, 일부다처나 영적 재취 따위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가르쳐진 적도, 내가 알고 있던 적도 없습니다. 그 분은 나 밖엔 아내가 없었고, 내가 아는 한 그가 그런 적이 없습니다. " -(몰몬)교회사, 제3권 355-356쪽.
패니 앨저
스밑의 첫 복수결혼 아내는 스밑 부부의 양녀였던 패니 앨저라는 것이 유력설이다. 스밑의 가까운 친구였던 벤저민 잔슨, 앤 일라이저 웹, 찬시 웹 등의 증언(목격담)에 따르면, 당시 16-17세였던 앨저는 매우 예쁘고 상냥해 에마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예언자' 스밑과의 '천상결혼' 관계를 알아챈 에마는 분노하여 앨저를 스밑 눈 앞에서 숨기려 했고, 집밖으로 내쳤다. 결국 앤 일라이저의 어머니가 앨저를 친척에게 보낼 때까지 데리고 있겠다고 제언했다.
(몰몬경 목격증인들의 한 명인) 알리버 카우더리는 스밑과 앨저의 관계를 결혼과는 다른 무엇으로 느끼고 "더럽고, 야비하고, 추잡한 불륜"으로 묘사했다.
교회는 루머를 잠재우기 위해 '성도들 사이의 결혼에 관한 법규의 장'을 채택했다.
"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복수결혼..문제로 비난을 받는 연고로, 우리는 한 남편이 한 아내를 얻어야 함을 믿는다고 선언한다."
이 '결혼령'은 정경화되고 교리성약서에 포함돼 출판된다. 1852년엔 18년간 비밀로만 해오던 복수결혼을 공식 교리화하고 나자 결혼령은 후에 삭제된다.
벤저민 잔슨에 의하면, 패니 앨저는 1837년 겨울까지 인근 메이필드의 친척 집에 머물다가 스밑이 미주리로 피신해 버리자, 가족과 함께 서부로 떠나 인디애나에 머물면서 그곳 남자 솔로몬 커스터와 결혼하여 자녀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몰몬교를 떠나지 않고 스밑과의 우정도 지속했다.
잔슨은 추가했다. "나는 지금 안다. 노부에서처럼 커틀랜드에서도 예언자의 복수관계들에 대한 의혹 또는 인식은 커틀랜드에서의 배교와 혼란의 원인 중 하나였음을.."
루신다 해리스
스밑의 두 번 째 복수결혼 아내인 루신다 해리스. 그는, 1834년 가을, 당시의 남편 조지와 함께 '후기성도교회'에 가입했다. 둘은 포교사 오슨 프랱이 테레 호트에서 몇 차례 설교한 뒤 침례를 베푼 대상이었다. 이듬해인 '35년, 부부는 '시온'인 미주리로 가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다.
1838년 스밑은 커틀랜드로부터 미주리 파웨스트로 피신해 왔을 당시 (가족도 이내 합류) 그곳 지도자 해리스로부터 따스한 영접을 받았고, 해리스네 집에 두 달 머물다 자기네 집을 마련한다.
몰몬 '사도' 오슨 프랱의 아내 새러 프랱은 스밑이 미주리에 살던 그즈음 루신다와 비밀리에 결혼한 것으로 추정했다. 루신다는 스밑과 결혼하고도 계속 남편 조지와 함께 사는 '일처다부' 관계(polyandrous)를 유지했다. 스밑의 다른 복수결혼 관계도 대개는 그러했다.
스밑은 다시 일리노이로 피신한 뒤, 루신다와 조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집 건너편에 그들이 있을 곳을 마련했다고 밝혔고, 얼마 후 루신다/조지도 노부로 옮겨 간다.
훗날 '노부 익스파지터' 문제가 터진 1844년 6월 10일, 조지는 시의회를 진행하면서 신문사를 허물어야 한다는 느낌을 밝혔고 의회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월 27일, 스밑이 카티지에서 옥사한 뒤 시신이 노부로 돌아왔을 때, B.W. 리취먼드 방문기자는 스밑과 루신다의 관계를 모른 채 "(해리스 부인은) 조셒 스밑의 시신 머리 곁에 서서 얼굴을 가린 채 온몸을 떨며 울었다"고 썼다.
훗날 루신다는 조지와 이혼하고, 카톨맄 '사랑의수녀회'에 입회했고, 남북전쟁이 터지자 테네시 멤피스 병원에서 활약했다.
스밑/영의 아내, 루이사 비맨
루이사 비맨은 오랫동안 스밑의 첫 복수결혼 아내로 잘못 알려졌다. 비맨은 앞서 1834년, 스밑과 몇몇 포교사들이 뉴욬주 에이번에 있는 비맨의 집에 머물 당시, 스밑을 처음 만났다.
그녀의 언니(여동생?) 메리는 "그(스밑)의 단체를 나는 존경했고, 그의 담화가 내겐 음식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포교사의 한 명이었던 팔리 프랱도, 비맨 가족에 대해, "우호적이고 재미 있는 가정"으로서, 비맨과 세 딸이 모두 노래를 잘했다고 증언했다.
비맨 일가는 몰몬교에 입교한 뒤인 1835년 커틀랜드로 이주했고 비맨은 62세에 죽었다. 후에 루이사는 어머니 새러와 함께 미주리-노부로 이주했다. 노부에 온 얼마 후 새러가 전염병으로 죽었고 루이사는 메리와 함께 형부(제부?) 조셉 베이츠 노블네에서 살았다.
1840년 가을, 스밑은 노블에게 '계시'로 받았다는 복수결혼 원리를 가르친 뒤 자신과 당시 25세인 루이사와의 결혼을 제의했다. 이때 스밑은 노블에게 "그대에게 이것을 계시함으로써 나는 내 목숨을 그대 수중에 맡기는 것이라오. 그러니까 혹여 악한 기회에 나를 배신하고 적에게 넘겨주질랑은 마오."라고 경고했다.
루이사의 또다른 제부(형부?), 이래스터스 스노우에 따르면, 둘의 결혼식은 1841년 4월 5일 노부시 메인스트맅 인근의 한 숲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는데, 스밑이 예식문을 읽고 노블스가 따라 했다.
루이사는 남자용 모자/겉옷 차림이었다.
노블은 자신의 집에서 첫날 밤을 보내는 둘에게 "불을 끄고 침대에 들면, 안전할 겁니다"라고 격려했다.
스밑의 사후, 루이사는 제2대 수장 브리검 영의 9번째 아내로 재혼해 다섯 자녀를 낳았지만, 모두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고, 자신은 유방암으로 35세에 숨졌다.
유타 주 초기 개척자의 한 명인 잔 도일 리에 따르면, (1851년 1월 13일에 세워진), 유타 남부의 첫 정착지가 (복수결혼 계시에 순응한 '첫' 여인인) 그녀의 이름을 따 '포트 루이사'(현재의 패러완)로 기념 명명됐었다. 이 도시는 현재 '남부 유타의 어머니 타운'으로 불린다.
참고자료:
http://www.wivesofjosephsmit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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