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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기타 서신

사도 요한의 기쁨과 불쾌감





사도 요한의 기쁨과 불쾌감

-제3 요한서신서의 분위기



제3 요한서신서(요서C)는 사도이자 교회 원로(장로)인 요한이 가이우스(Gaius/가이오. 로마식: Caius/카이우스)에게 보낸 편지로, "사랑하는 님! 그대의 영이 잘 됨 같이 그대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시길 빕니다!"(2절)이라는 서두의 기원문으로 유명한 서신이다. 장절 분류로는 단 한 장으로 되어 있다. 


'가이우스'란 이름이 신약성경에 자주 나오지만, 이 가이우스는 그들과 공통점이 없기에 여기서는 다른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요한은, 그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대상인 가이우스가 평소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다. 요한은 자신이 낳고 기르다시피 한 그의 영적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보다 더 한 기쁨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래선지 이  짧은 서신에도 '진리' 또는 '참'이란 말이 무려 8번 나타난다. 성경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는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강조한 것은 사도 요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나 요한은 가이우스에게 특별히 한 가지를 더 주문하고 있다. 사도들을 비롯해 복음 전하고 다니는 형제들을 늘 정성껏 맞아주고 또 잘 배웅하라는 것. 물론 가이우스 나름으로 평소 잘 알아서 할 테지만 이왕 하는 김에 더 잘 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땅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성도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요한 장로가 특별히 이런 주문을 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실은 본 서신을 보낸 주된 이유였다. 왜냐하면 그가 가이우스에게서는 이런  기쁨을 느끼는 반면, 또 다른 교회 지도자인 디오트레페스(Diotrephes/디오드레베)에게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형언 못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은 자못 놀라울 정도로 그에 대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매우 원색적이고 긴장된 용어를 써 가며 불편한 심경과 실망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요한은 타지를 두루 다니며 선교하는 형제들을 그 교회로 보내기 앞서, 몇 자의 짧은 메모 같은 편지를 사전에 보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스로 으뜸이 되고 싶어하는 디오트레페스는 사도의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따라서 형제들 일행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You're unwelcome here!"라면서. 이 얼마나 무례하고 오만한 행동인가?! 


소위 신자이고 지도자라는 디오트레페스의 이런 행패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과 외부의 형제들에 대해 거짓으로 험담을 늘어놓는가 하면, 자신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을 뿐더러 딴 성도가 환영하는 것까지 못하게 막아 놓은 뒤에, 환영하려던 교우들을 아예 교회에서 내쫓아버렸다. 이 얼마나 흉악하고, 잔인하고, 포학하고, 사탄적인가! 


이랬기에 요한은 혹시 이 다음에 이 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에는 디오트레페스를 특별히 기억하여 주시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만큼 마음에 맺힌 문제라는 이야기이겠다. 물론 요한은 미움으로 그러진 않고 어디까지 디오트레페스의 영혼에 대한 긍휼 안에서 그러겠다는 것이 본서의 원문에 나타난 분위기이다. 



'디오트레페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인 두 낱말, 즉 명사 '디오스(주신 곧 제우스)'+'트레포'(양육하다)가 합성된 것으로, "(제우스)신에게 양육 받은 이" 또는 '제우스의 입양아'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마도 그 어머니가 그를 낳고 나서 신의 가호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이름은 그의 교만과 배신의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릴 때부터 그는 속 맘으로 "나는 신에게 총애 받고 신에 의해 길러진, 신의 아들이다"-이런 생각이 은연중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올림포스의 주신이라는 제우스는 실제 신도 아닌 상상과 허구, 신화의 주인공일 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름만의 악령에 불과한 존재였을 터이다. 


오히려 참된 의미의 신의 자녀들은 바로 크리스천들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다!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하나님의 양자가 된 우리들이 바로 그렇다. 


디오트레페스의 이름 같은 잡신의 아들이 참 신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주신의 입양아'라고 (잠재의식 속에서) 늘 자임해왔을지 모를 디오트레페스는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나 교우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이야기를 꺼냈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을지 모른다. 

그가 혹 거듭났다면, 예수 믿을 당시 이름을 바꿨으면 나을 뻔 했다. 또 이름을 그냥 두더라도 잡신의 아들 같은 잠재적 상상이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미련 따위는 아예 버렸어야 했다. 



디오트레페스는 어쩌다 크리스천이 되어 해당 교회의 유력 인사 내지 지도자까지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 으뜸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12 제자들 중에도 페트로, (요한의 형) 야코보와 함께 '3인방' 또는 '3 총사' 같은 핵심 제자였고 초대 교회 주요 지도자였던 사도 요한과 그 수행자들을 뭐 같이 여긴 것이다. 


그는 사도 요한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깡그리 무시하는 안중무인 격의, 콧대 높고 건방진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지도자로 있는 교회에 사도들과 형제들을 전혀 맞아들이길 원치 않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그들에 대해 험담과 비방,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았다. 즉 자신이 있는 교회의 교인들과 주변 신자들에게 사도와 그 수행자들에 대한 인격 모독 발언과 악담을 늘어 놓은 것이다. 그 가싶의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매우 고도의 죄악이고, 간교한 책략이며, 배신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크리스천이고 교회 지도자일 수 있었던 것인지? 이미 당대에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던 사탄의 계략과 힘을 새삼 절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디오트레페스에게는 온갖 종류의 악덕이란 악덕은 죄다 따랐다. 그는 이름 있고 덕망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을 매우 질시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존중하는 교인들이 형제들을 환영하려고 나설 때, 그는 적극 그 선행을 막았을 뿐더러 '출교'라는 극단적이고 막다른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당시는 지역별로 교회 수도 얼마 안 되던 시기였고 박해가 심했기에, 오늘날처럼 지역 내의 '수평이동' 같은 것이 자유롭지 못할 때였다. 그러니 교회에서 내쫓긴 그 착한 교우들의 억울함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에 대한 요한의 심경도 마찬가지였고.


실로 디오트레페스는 파리새(바리새)들처럼 자신도 선행을 하지 않을 뿐더러 남의 선행도 막는 훼방자였다. 교인이라기보다 악인이요, 크리스천이기보다 적 크리스토에 더 가까운 디오트레페스가 점거하다시피 한 그 교회의 앞날은 너무나 어두웠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떨까? 디오트레페스와 같은 지도자가 없을까? 얼마든지 발견될 것이다! 현대 교회는 과거보다 숫자도 훨씬 많거니와 그만큼 문제도 많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은 하필 왜 가이우스에게 디오트레페스 이야기를 한 것일까? 아마도 전자가 후자와 같은 교회 교인이었거나 같은 지역 내의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가이우스 말고도 또 다른 한 사람을 언급한다. 데메트리우스(데메드리오/Demetrius)라는 교우다. 

요한에 따르면, 데메트리우스는 매우 신실하고 듬직한 사람이다. 요한은 분명히 데메트리우스를 디오트레페스와 서로 대조시킬 의도를 갖고 있다. 

데메트리우스에 관한 설명은 아주 짧다. 그러나 요한은 그에 관한 설명을 다량 생략하고서도 핵심은 충분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데메트리우스는 디오트레페스와 달리, 뭇 사람들에게도 진실성을 인정받고, 성경 진리 자체와 또한 사도들로부터도 인정의 증언을 받는 사람일 정도로 신실했다는 것이다. 

디오트레페스와 비교하면 극과 극 차이인 셈이다. 



요한은 모든 성도들이 디오트레페스가 아닌 데메트리우스를 본받기를 열망하고 있다. 

성도는 마땅히 데메트리우스나 가이우스를 닮아야 할 것이다 .


디오트레페스를 추호라도 닮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쾌감의 대상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