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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22] 예수님이 성취하신 시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시 22:1 이하 참조)

 

다빋이 쓴, 구약 시편 제22편의 전반부(1-21절)는 메시아(=크리스토)의 수난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밖에도 구약 성경엔 이사야 53장 등 여러 수난 예언들이 있습니다. 

이 시는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예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관한 직접 언급은 없고 단지 상징적인 부분들이 있습니다. 연유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다빋 당대엔 십자가 처형 개념이 없어설지도 모릅니다. 십자가 처형 관행은 훨씬 후대인 수 세기 후 페르시아 등에서 시작되지요. 

하지만 이 시는 메시아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의 영적/심적/물리적 상황을 매우 리얼하게 묘사해 놓아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반 유대인들은 시22가 메시아의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수난 받는 메시아" 개념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 53, 시22에 나타난 인물을 결코 메시아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기에 다빋/슐로모처럼 위엄과 권세가 넘쳐 즉각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고 통치하는 군주로 이해하지, 수난 받아 죽는 메시아를 꿈에도 결코 그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이단자'로 몰았던, 하찮아 보이는 나자렡 목수-예슈아(=예수)이겠습니까.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참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 받아 들여질 리 만무하지요. 사형수로서 십자가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사형수라니?!..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겐 전혀/절대로 이해가 안 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수난/부활/승천하신 지 2000년이 지났건만 유대인들은 아직도 자기네 이상에 맞는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난과는 전혀 관계 없이 이스라엘 땅을  모두 완전 회복시켜 주고 위엄과 권세를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메시아'로 받아 들여 경배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소위 '제3성전' 건립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에 임하여 경배를 받을 '메시아'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거짓 메시아, 즉 최악의 적 크리스토인 '짐승' 또는 그 연계자가 될 것이고.

그러므로 그런 유대인들과 같이 손잡고 소위 '찌온운동'(시온운동)을 펼치는 기독교인들은 큰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지요. 기독교계가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찌온운동을 돕는다고 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성지를 존중하는 세계 기독교인들을 이용할 따름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택하시고 그 분의 구원 초청을 받아 들이는 극소수의 유대인들만 예수님을 받아 들일 뿐이지요. 초기 교회의 뿌리인 유대인 신자들처럼 '그루터기', '남은 무리'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율법을 전수한 유대인의 우위성/독특성도 있고(로마 3:1,2) 유대인 다수가 돌아오는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맨 나중의 일입니다(롬 10:1, 11:25,26: 주: 이 구절은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다 자동 구원받는다는 뜻이 결코 아님).

유대인들이 뭐라든 간에, 하나님이 보내신 참 메시아는 인류의 죄값을 떠 맡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기에 십자가 위에서 수난 받고 되살아나 하늘에 오르신 그 분입니다! 시22는 어느 모로든 참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께 해당되는 예언이고, 십자가 위에서 정확하게 성취된 말씀입니다.  

실제로 1절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친 말씀이고 7, 8, 16, 17절 등도 처형 당시 현장에서 극명하게 성취됐고, 나머지 부분들도 문맥 상 분명히 내/외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성취됐지요. (신약 앞 부분의 4 복음서들의 뒷 부분-예수님 수난 기록을 참조하시길)

물론 유대인들은 이를 극구 부정합니다. 시22는 메시아 예언도 "아닐" 뿐더러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지도 "않았다"고 생떼를 씁니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이 예언 내용은 본 시인인 다빋의 삶 속에라도 이뤄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빋 자신은 본 시 내용 중의 수난을 당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면서도 왜 그런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를 않습니다.

다빋은 대언자 이사야처럼 분명히 미래에 오신 메시아가 겪을 엄청난 수난을 미리 영으로, 성령으로 내다 봤습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초두부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이 말씀을 외치셨지요(마태복음서 27:46, 마르코스복음=막 15:34).

이어서 메시아는 기도를 응답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합니다(1-4절).
여기서 우리는 겥세마네 동산에서 "이 (쓰디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라고 부르짖었던 주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주님의 모든 기도는 응답 받았어도(신약 히브리서 5:7 참조) 이 호소만은 응답이 불가했습니다.
이 죽음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지요(마태 26:39끝, 히 2:8b 참조).  

여기 이 시에서..수난 받는 이 주인공은, 자신의 이런 억울한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거룩하셔서 선조가 그 분을 신뢰/의존함으로써 응답 받고 구원 받아 수치를 면할 수 있었음을 추억합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결국 하나님은..메시아를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 버려 두셨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도 있는데(마 26:53)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까닭은, 그렇게 해야만 메시아가 죽음으로써 희생의 피를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 즉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인류 대속에 필요한 죄값 치르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죠(신약 로마서 8:3,4 참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잔인한 구약 하나님"으로 매도하거나 우리 죄를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을 부정합니다. 오직 사랑이면 다 된다는 식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순결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공의스러우셔서 피값 없이는 죄를 그냥 두실 수가 없습니다. 태초에 아담/하와가 범죄했을 때 동산의 애꿎은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리셔야 했고 그 가죽으로 둘에게 옷을 해 입히신 까닭도 그것입니다(구약 창세기 3:21). 즉 아담/하와의 죄값을 피로써 치를 수 있음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진리를 아담의 아들 아벨이 배워 어린양 제사를 드렸던 것이고요(창 4:4a, 히 11:4).

아브라함부터 신약시대 직전까지 이르는 장구한 기간동안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불문/성문의 제사전통을 이어 온 이유도 그것입니다. 피 없이는 죄의 용서도 대속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히 9:7).
 
그랬기에 온 인류를 위해 땅에 오신 성자/메시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실 때 하나님은 외면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온 세상 인류의 새카만 죄악이 메시아의 한 몸에 다 얹혀졌을 때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가 하나님 앞에 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시므로 당연히 인류를 있는 그대로 모두 용서하고 사랑해 주셨어야 한다고 믿기에, 예수님의 희생은 있을 수 없는 희생,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또는 애꿎고 억울한 죽음만이었다고 도외시 해 버립니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지, 공의의 하나님으로는 이해하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 무엇보다 인류가 대속의 길, 구원 받을 참 길을 알지 못하게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속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소위 신학자들이라는 수많은 자유주의자/진보주의자들은 그래서 메시아의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잔인한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피값과 대속이 요구되는 구원의 신앙을 '도살신학'이라고 빗대어 천대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가혹한 처사를 내릴 리가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그들은 지옥도 믿지 않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무서운 형벌을 생각이나 하실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뉴에이저들, 프리메이슨들이 공유하는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하나님 앞에 그릇되고 망령된지를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자신들이 죽어 마땅하고 지옥에서 영벌을 받아 마땅한 사실을 알지 못한 때문입니다. 더욱이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는 탓이지요.

사실..십자가에 마땅히 매달렸어야 할 사람은 예수님이기보다 그들이며..더 나아가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천 번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더러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거룩하시기에 죄를 그냥은 간과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았을 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인류가 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내 버려 두실 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 홍수처럼 인류를 한꺼번에 싹쓸이 해 죽이실 수도 있는데도, 오직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대신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내 버려 두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결정체로 보지 못하고, '잔인하고 가혹한 하나님'으로만 보는 신자들은 매우 불행한 교인들입니다. 헬렌 켈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지요.
우리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버림받아야 했고 왜 하나님은 내버려 두시고 외면하셔야만 했는지를 이해하고 그 사랑을 믿어야만 합니다!

둘째로..수난 받는 이 메시아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절절이 호소합니다.
즉 자신은 무리 앞에서 사람 아닌 벌레 신세에 불과하고 비방거리 조롱거리이며..아래서 쳐다 보는 무리가 다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빗대어 말한다는 겁니다:

    "그가 주/야웨님을 의지한다니 야웨님이 구원하시라지. 그 분이 그를 기뻐하신다니 건지실 테지."


흥! 흥! 하고 콧방귀를 픽픽 날리는 듯한 이런 말투가-이게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한 태도입니까! 인간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기에 죄값, 피값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악한 말은 수천년 뒤 바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유대인들을 통해 그대로 터져 나왔습니다(마 27:43). 아마 자신들도 모르게 그랬을 겁니다. 다빋이 내다 본 예언 그대로가 이뤄진 것이지요!

이제 본 시편의 주인공-메시아는 은혜롭던 어릴 적 과거를 회상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돼 권능으로 태어날 탄생 때와 젖먹이 때부터 아버지 하나님께 보호 받고 그 분을 의지하게 되고 맡겨진 바 되었고, 아버지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추억하고 감사합니다(복음서 탄생 부분, 특히 뤀 2:52 등 참조).

그러면서..과거에 그러셨던 아버지께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환난이 가깝고 나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얼마나 간곡하고 처절한 호소의 외침입니까! 우리도 살아가다 비슷한 경우를 종종 겪습니다만, 어찌 주님 마음과 같겠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보질 않아서 예수님의 절규를 있는 그대로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로마인/유대인들의 모습은 마치 둘러 싼 힘센 황소들 같고, 그들을 배후조종하는 마귀는 먹이를 갈갈이 찢으려고 입 벌리고 포효하는 사자 같은 모습들입니다. 벌거벗은 사형수를 올려다 보며 조소하고 놀리고 희희낙락하는가 하면, 인정사정 없이 죄인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악한 무리입니다.

그런 반면, 매달린 이 사형수 자신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는 물처럼 쏟아지다시피 했고 내 뼈들은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밀랍처럼 속에서 녹아 내렸습니다."


여러분..십자가 위, 주님의 몸 사정, 속 사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손발이 못 박혀 매달린 채 여섯 시간이나 고통을 겪는 동안 온몸의 혈액이 거의 체액과 분리된 채 그 무게로 인해 오장육부 아래로 고여, 나중 주님이 숨지신 뒤 로마 병사가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심장에 고였던 물까지 쏟아져 나올 정도였습니다.  

두 팔을 벌린 채 장시간 매달려 있으면, 온몸의 뼈는 부분적으로 쏠리는 무게와 불균형 탓에 뼈 마디 관절마디 등에 이상이 오고, 삐져 나오고 자연히 어그러지게 돼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있는 대로 겪던 끝에 온몸에 힘이 다 빠지자 마음까지 녹아 내립니다.

그뿐입니까?

    "내 힘은 말라 토기 조각 같고 내 혀는 입 천장에 붙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나를 죽음의 땅에 놓아 두셨습니다."


주님은 장시간 손과 발의 출혈로 피가 다 빠지고 온 체액이 아래로 쏠리면서 힘이 마를 대로 마르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극심한 목마름을 호소합니다.
우리도 장시간 물을 마시지 못했을 때 입 속이 바짝 말라 정말로 혀가 입 천정에 쩍쩍 달라 붙는 것을 느낍니다. 하물며 전신에서 출혈이 다 된 상태이겠습니까!

이제 주님은 "목이 마르다"고 시인하셨고, 한 사람이 달려가 갯솜(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셔 갈대 끝에다 꿰어 마시우게 했습니다(마 27:48, 맑 15:36, 요19:29). 그러나 주님은 맛만 보고 그것이 일종의 진통제임을 아시고 더는 마시지 않으십니다. 수난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죠. 역시 놀랍게 이 말씀은 본 시구와 다빋의 또 다른 시인, 시편 69:21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즉 고대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주님은 "목 마르다"고 시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고대의 예언이 현실 속에서 이렇게 극명하고 정확하게 성취된 데 대해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두려울 뿐이며..이를 악착같이 부정해온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절감하게 되는 동시에 그들의 영에 대해 절로 측은함을 느끼게 되지요. 


동시에.. 주님은 임박한 죽음을 느끼십니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죽음의 땅이라고 내다 보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끝까지 그 분을 죽게 놓아 두신 것입니다.

16절은 십자가 처형의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싼 채
나의 (두) 손과 발들을 찔렀습니다."


즉 주님의 두 손발이 못 박힌 것까지 예언된 셈입니다. 
십자가 처형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이 구절에 유대인들이 마음이 찔렸는지, 훨씬 후대에 완성된 구약성경인 마쏘라 사본엔 터무니 없는 원문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 본래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원본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다만 당대에 그리스어 역인 70인 경이 있어서, 이런 사본으로부터 히브리어 원문으로 번역됐습니다.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시-2216-뒤틀지-마라  참조 ]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한 구절을 바꿔 놓는다고 해서 메시아 예수님의 수난 성취를 뒤집을 순 없습니다. 다른 구절들도 모두 입 모아 예수님 안에서의 성취를 소리지르기 때문이지요. 만약 유대인들이 딴 구절들까지도 부인하다면 길가의 돌들이라도 소리지를 것입니다!

자..봅시다. 이 메시아는 또 말씀합니다.

    "나는 내 뼈를 마디마디 셀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오랜 시간 피가 모두 흘러 나오고 바짝 말라 버린 주님의 온몸이, 이젠 뼈 마디가 피부 위로 거의 두드러져 셀 수 있을 정도까지 됐다는 것입니다.

17, 18절도 십자가 아래서 극명하게 이뤄진 장면들입니다.
즉 사람들이 전라에 가까운 수치스런 주님의 모습을 부담도 겁도 없이 빤히 쳐다 보고 있었지요(뤀 23:35).

또한 로마 군병들이 주님의 겉옷을 나눠 갖고 속옷 마저도 제비 뽑아 가진 것입니다(요한복음 19:24). 마태/루카/요한 등 3개 복음서가 모두 이 사실을 언급합니다(마 27:35, 뤀 23:34). 더구나 요한은 바로 이 시편 말씀을 직접 인용까지 하면서 정확하게 성취됐음을 밝혔지요. 당대 로마군의 하위급 군졸들은 가난한 용병이었기에 남의 땀내 나는 옷가지도 이런 식으로 나눠 가졌습니다. 고대에는 옷감이 귀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주님은 단 벌 옷까지 모두 사람들에게 나눠 주신 셈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이처럼 철저히 박해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이런 사실까지도 무마하려 듭니다(신약 행전 2:23). 그래도 주님은, 그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몰라서 그렇다고 아버지께 용서를 비셨지요(뤀 23:34).

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유대/로마인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오, 주님, 내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내 죄 탓에 주님이 이 지경이 되셨나이다!

이 주인공은 또 외칩니다.

    "오, 주/야웨님!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나의 힘! 어서 나를 도우소서!"

죽어 가시는 주님의 탄원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운명의 시간이 다가 옵니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져 주시고
나의 소중한 목숨을 개들의 세력으로부터 구해 주소서!
나를 사자들의 입에서 구해 내시고
들소들의 뿔로부터 내 기도를 들어 구출하소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다던 주님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즉 싸탄의 세력으로부터 영혼을 보존해 달라는 탄원입니다.
아버지는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혼을 보존하시어..
영옥(퓔라케)에서도 지켜 주시고(신약 페트로A=벧전 3:19),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40일 후, 아드님을 (지상시간으로 33년만에) 다시 하늘로 되찾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 우리도 죽기 직전에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도 시대의 스테판도 그렇게 했지요(행 7:59). ]

시 22편의 주인공은 명백히, 아니 절대로 예수 크리스토이십니다!
참 메시아는 그분 뿐입니다!
베틀레헴에서 나신, 나자렡 목수 출신..바로 그 분이십니다!
3년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유대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며 사랑을 베푸시던 그 분입니다.

수 천 년 전 다빋의 예언인 시편 말씀은 주님께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왜 주님은 이토록 처참한 죽음을 당하셔야 했나요?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십자가 위에서
우리 위해 목숨을 주시고
피와 물을 모두 흘리시어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 죄를 영원히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와
아버지께
영원히 영광!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과 은총에 대한 감격이
티엘티 성도에게 늘 함께 하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