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평
패커의 나머지 문제점들
-패커의 죽음 후평(2)
[이 글은 지난 7월 하순에 작고한 복음주의자, J. I. 패커(James Innell Packer)에 대한 비평 시리즈 제2회 분이다. 이를 읽기 전, 독자는 되도록 지난 번 글을 먼저 읽어 주길 바란다. truthnlove.tistory.com/entry/J-I-패커의-죽음1 ]
얼마 전 죽은 영국-캐나다의 복음주의 신학자, 패커는 분별하긴 했다. 그러나 하다 만 사람처럼 보인다. 왜냐 하면, 깨달은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진 않았다고, 즉 절반 복음주의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왜 그랬을까? 현실과의 대척점에서 타협 쪽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만 것이다.
고전학 연구정신이 투철했던 패커는 비국교도(nonconformist) 청교도 저술가인 존 오웬을 섭렵한 뒤인 1948년, 옥스퍼드의 코퍼스 크리스티(CC/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런던의 오크 힐 신학대학(OHTC)에서 그리스어/라틴어/철학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1948-1949 학년도의 매 주일 저녁,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저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 박사(Dr. Martin Loyd-Jones)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22살, 박사는 50살일 때였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설교였다. 패커는 "감전시키는 듯한 충격의 힘으로 다가와, 그 누구보다 하느님(패커는 성공회인이었다)에 대한 감각을 최소한 한 명(패커 자신)에게 전달해줬다"며 "내가 여태까지 알아온 분들중, 가장 위인이었다"고 손꼽았다. 심지어 "그 어떤 인간 교사들보다 더 (영향력이) 실감났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여기서 우리는 패커가 수많은 여느 크리스천처럼 명사 중심의 감각 내지 신앙을 지녔다는 느낌이 온다. 흔히 우리는 어릴 적부터 나름 우상(idol)이라느니 영웅(히어로/히로인), 역할모범(role model) 따위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그럴 만한 대상자들이 몇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전에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예상치 않게 급기야 가장 불안한, 또는 가장 불건전하거나 심지어 불행한 차원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예감케 됐다. 그래서 명사중심주의를 경계해야 함을 나날이 더 깨닫게 됐다. 아무리 신앙위인이라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위인명사들은 물론, 심지어 사도 파울 등 그 어떤 성경 인물보다도 주님과 그 말씀 진리를 더 높이고 사랑해야 한다!]
패커는 훗날 자신이 그처럼 "거하게" 찬탄했던 그 로이드-존스로부터 버림받는 날이 온다. 우선 둘 사이는 일단 서로 마음이 통하는 좋은 사이로 출발했다. 나이차도 큰 둘이서 의기투합하여 청교도에 대한 통찰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이해/응용시킬 목적으로 퓨리턴 컨퍼런스(PC)를 공동설립해 20년 간이나 끌고 간 것이다.
패커는 1950년 초엽,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에서 (성공회)사제 수업을 닦은 뒤,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1952년엔 국교회 사제보(deacon)가 된 뒤 이듬 해 버밍엄 대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고, 1954년에는 역시 청교도 목회자인 리처드 백스터의 사상을 연구한 논문으로 옥스퍼드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즈음 그는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 생애 최초의 저서를 펴낸 뒤인 1961년, 앞서 결혼한 간호사 출신의 아내와 함께 옥스퍼드로 다시 이사를 가서, 국교회 신학을 강화하기 위해 존 스토트와 함께 개설한 복음주의 연구센터인 래티머 하우스(Latimer House)의 사서로, 그 다음은 관리장으로 모두 9년간 일했다.
로이드-존스와 결별
1966년 10월, 전국복음주의협의회(NAE)가 열리면서, 로이드-존스 박사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교리적 혼합주의에 빠진 국교회 등 교단에서 당장 떠나 독립된 복음주의 협의회를 만들어 서로 친교를 나누자고 호소했다. 로이드-존스는 성공회인인 패커나 스토트가 형편이 좀 어렵더라도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깊이 숙고라도 할 줄로 알았다.
그러나 회의의 의장이었던 스토트는 박사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불문율을 깨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거부해버렸다. 당시 회의장에 없었던 패커도 스토트 편을 들었다. 분열의 폭은 1970년에 아주 커져서, 패커는 국교회 복음주의자 콜린 뷰캐넌 및 2명의 앵글로-카톨맄교(국교회의 카톨맄주의를 확대한 고교회=High Church) 사람과 함께 '연합으로 성숙하자-영국내 연합교회 구성을 위한 제안'을 엮어냈다.
이 책을 본 로이드-존스는 아쉽지만 패커를 복음주의 매거진 편집진에서 제명하고, 둘이서 공동 개설해 여태 지탱해온 퓨리턴 컨퍼런스도 폐쇄했다. 이처럼 패커는 진전된 복음주의보다는 자신의 안일을 위한 국교회 바탕과 에큐메니즘에 안주해버린 것이다.
1970년대초, 패커는 인터바시티 출판사(IVP)에게 자신이 이밴젤리컬 매거진(EM)에 시리즈로 써낸 글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출판사는 때마침 영국을 휩쓸고 있던 은사주의의 이슈에 관한 저술이 필요하다며 그것부터 먼저 요구해왔다. 만약 이때 그가 이것을 수락했더라면, 은사주의에 대한 국교회측 시각의 중요한 지침서가 될 뻔했다.
아무튼 패커는 그 대신 호더&스토튼(Hodder & Stoughton)에 제의해, 1973년 '하느님 알기'란 제목으로 책이 발행됐다. 이 책은 150만권이나 팔려나갈 만큼 큰 인기를 누리면서 그의 국제적 명성이 삽시간에 치솟았다. 이 책은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바로 오늘날 (국)교회 미약성의 핵심 뿌리라고 간파했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그는 은사나 은사주의가 거의 성령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979년, 패커는 생애에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된다. 옥스퍼드 학부 시절부터 친구였던 제임스 휴스턴으로부터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전트 칼리지의 교수로 와 달라는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는 행정업무는 면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하고, 가족이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그는 거기서 생애의 끝까지 교수로 지냈다.
천주교와 손잡아
패커의 에큐메니즘은 1994년 더 큰 사고를 부른다. 몇몇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천주교 측과 손을 잡고 '복음주의자와 천주교인이 더불어 함께'(ECT)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미국의 찰스(척) 콜슨(감옥선교회 대표, 템플턴 상 수상자)과 캐나다->미국 출신의 루터교도였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리처드 존 뉴하우스 등이 합세해, 서명했다. 이것은 그를 신뢰해온 스프라울 목사 등에게 놀라움과 의아심을 심어줬다. 이들은 가히 거꾸로 간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패커는, 자신의 책을 통해 신교 개혁가들 외에도 신정통주의자 카를 바르트, 천주교 초기의 사도 및 속사도 교부들, 천주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알아야 할 신학자들'로 추천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천주교와의 합류와 미래의 합일/통합을 추구한다면, 학자는 둘째치고 신자로서도 별 가치가 없게 되고 만다. 신교에서 천주교로 가버리고도 우리 찬송가에 아직도 버젓이 '작품'(*'환난과 핍박 중에도': 이 가사는 천주교 쪽을 위한 것이었지, 신교 쪽이 아니었다!)이 남아있는 프레더맄 윌리엄 페이버(F. W. Faber) 같은 이가 그런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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