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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25:1-13] 슬기로운 다섯처럼(아구르)


마태복음 25:1-13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그 분의 이름을 높입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주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함께 위 말씀을 묵상하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의 종말 예언에 이어 하신 여러 비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여러 비유에서 주님은 한결 같이 '깨어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또한 주님의 일에 신실하고 끝까지 충성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주님이 종말을 매우 중시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종말은 하나님의 왕국의 완성 및 천국과 직결되기 때문이죠.


위 본문의 '열 처녀' 비유에서도 주님은 또 다시 깨어 있기를 촉구하시면서 중요한 몇 가지를 귀띔하십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여러 종말 비유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잘 아는 이야기이며, 찬송가 '신랑 되신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복음송 '내 등에 기름을 채우소서'(Give me oil in my lamp), 성가 '열 처녀' 등 수많은 노래들이 이 비유를 소재로 만들어졌지요.


우선 주님은, 하늘나라는 마치 각각 등잔=램프를 들고 신랑을 맞아 들이려는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한 처녀들이고요.

왜 주님께서는 슬기로운 다섯만을 '천국'이라 하지 않고 어리석은 다섯까지 포함한 열 모두를 천국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본디 온전히 열 처녀가 모두 천국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마음이시지만, 아쉽게도 그 가운데 절반은 주님의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남은 다섯 처녀들까지 또는 그 일부라도 깨어 신랑을 맞을 수 있었다면 그보다 더 다행일 순 없겠지요. 그러나 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교회와 신자들 가운데는 깨어 있지 못하여 주님의 뜻에 어긋날 '절반'이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누구나 슬기롭거나 또는 미련할 수 있음을 뜻하지요. 누구도 "난 물론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속해!"라고 쉽사리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누구나 미련한 다섯이 아닌 슬기로운 다섯에 속하길 원하고 그러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슬기롭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등불을 갖춰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당대의 등불이란, 흙 따위로 만든 간단한 구조의 작은 등잔으로서 마치 위를 잘라낸 얇은 주전자처럼 생겨, 안에 올리브 기름을 넣고 심지를 끼어 넣은 주둥이 부분에 불을 붙이게 돼 있고, 주둥이와 반대 쪽엔 손잡이가 있어 쥐고 다닐 수 있게 돼 있었지요. 그리고, 평소엔 등경 위에 두게 돼 있습니다. (고대 결혼식 조명은 등잔보다도 횃불이기가 쉽다는 설이 있음. 등잔의 조명은 약하기 때문이다)

고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만들어진 탈무드의 전승에 따르면, 신랑/신부의 결혼 행렬에서 흔히 등잔 (또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10명씩 동원되곤 했답니다. 

고대 유대 결혼식은 세 가지 주된 절차가 있었다지요. 첫째는 양가 부친들끼리의 언약이며, 둘째는 남녀 당사자들끼리의 혼약이고, 셋째는 혼례식 자체였답니다. 혼약으로부터 약 1년 뒤 치러지는 이 혼례식 및 잔치 때는 신랑이 예기치 않은 때 찾아오는 게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무대에서는 앞서 두 가지 절차가 이미 끝난 상태이고, 혼례식과 잔치인 나머지만 치러지는 광경입니다. 이 예식만 치르면 신랑/신부는 그야말로 한 몸이 되고, 양가도 서로 사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마지막 절차이지요. 이 남은 최후 절차를 위해 신랑/신부는 물론 주위의 측근들이 얼마나 준비를 많이 하고 어떤 맘과 몸 가짐을 가져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
주님이 종말 예언을 뒷받침할 비유의 하나로 이것을 드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지요!


여기서, 중심 인물들은 혼인 행렬에 참여하기 위해 열 등잔을 들 책임을 떠 맡은 처녀들입니다. 필수적이고 중요한 존재이지요!
이 10명은 마땅히 각각 자기의 등잔을 예비해 놓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빠져선 안되겠지요. 등심지를 말끔히 고루어 돋워 놓고, 기름을 담고 불만 켜면 되도록 해 놓았다가 신랑이 오면 나서서 엄숙한 잔치 등불 행렬에 참여해야 할 터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당이나 예식장 같은 결혼식 장소의 들러리 또는 조명/행진 도우미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처녀들일까요?
아무래도 그 누구보다 순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잔치의 여주인공인 신부와 대등할 만큼 때 묻지 않고 청순한 사람들이고, 일찍이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는 여성들이며, 분명히 혼가에 의해 일가친척이나 동네사람들 가운데서 미리 골라 뽑혀 나온 젊은 아가씨들입니다. 현대 결혼식의 들러리들처럼 특별히 선택된, 이를테면 코어(core) 그룹의 일원들입니다.  

그러나 이 등잔행렬 처녀들은 단지 순결하기만 해선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지요. 이 순결한 처녀들은 미리 목욕재개로 온몸을 깨끗이 씻고 예복을 갖춰 입고 향유도 바르는 등 몸으로 준비할 뿐더러 맘으로도 준비해야 합니다.
슬기롭게 준비성이 밝아서, 바지런하게 미리 빈틈 없이 각각 자기의 등잔을 준비해 놓아야 하고, 때가 되면 냉큼 나서서 불을 밝힐 만반의 채비를 해 놓고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둠을 밝히고 잔치 분위기를 돋우워 그 누구보다 신랑/신부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할 도우미들입니다. 미리 특선된 만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큼은 꼭 완수해야 할 중책이 맡겨져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순결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순결이란 신랑이신 주님이 오실 때 기쁨으로 환영할 만큼 순결로 예비된 성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파울은 주님 오실 때 우리 모두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전돼 있기를 희구했습니다. 

 
주님은, 이 열 처녀들이 모두 각각 등잔을 갖춰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기본적인 준비는 된 셈이지요.

그런데, 등잔만 있어서도 안됩니다. 등잔과 심지만으로는 불을 켤 수가 없기 때문이죠. 당연히 불을 태울 연료인 기름-올리브 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미리 등잔과 함께, 따로 기름 그릇에다 올리브유를 부어 준비해 놓았습니다. 신랑이 늦게 오거나 야간의 혼례행사가 길어지는 등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각각 여분의 기름을 갖춰 놓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따로 여분의 올리브 유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게 웬 일이고 웬 말이랍니까! 등잔은 있는데 기름이 없다니..이 아가씨들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이었던 것인가요?
그들은 다른 다섯처럼 순결했고 똑 같이 등잔도 갖췄지만, 미련했고 게을렀기에 기름 준비를 하지 않았지요. "일단 등잔은 마련해 놨으니까, 기름이야 뭐 아무 때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의식에 대단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두렵게도 우리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가정을 뿌리칠 수가 없군요. 우리 중 그 누구도 "난 결코 미련한 다섯은 아냐!"라고 감히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 어찌 두려운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설마' 했던 상황이 '아니나 다를까'가 돼선 안되겠지요.
그래서 이제라도 정신 차려 자신을 점검하고, 생각하고, 슬기를 되찾아야 할 판입니다.
너무 늦지 않게 말입니다.


여기서, 미련함과 게으름은 상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미련함과 게으름은 처음부터 서로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분명히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대체로 서로 연계되기 마련입니다. 미련하니 바지런하기보다 게을러지기 쉽고 게으르다 보면 곧 미련해지기 십상이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충분히 똑똑하다고 믿기에 여유만만히 게으르게 지내면서 느긋하게 살아 갑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하이고나! 아니 뭘 그렇게 미리부터 수선스럽게 서두르고 난리야? 나처럼 대강 대강 준비하면서 좀 더 즐기다가 아,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들 하지 않을라구"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머잖아 곧 순식간에 다가온다는 데 문제가 있지요. 신랑이 지금 멀리서 오고 있기 때문이죠. 주님의 재림은 조만간에 벌어질 상황입니다. 그 분은 이제나 저제나 아버지만 아시는 천국 시각에 맞추어 곧 오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자, 내 아들아. 지금이다. 가거라!" 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이솝 우화 중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서 흥겨운 베짱이처럼 일단 인생은 신나게 즐기고 보자는 타입이죠. 옛 속요처럼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인생이 일장춘몽이라 아니 놀고..." 라고 노닙니다.

이것은 슬기로움이 아닌 미련함이죠.
물론 사람이 살다 보면 조급하게 서두르기만 할 게 아니라 여유롭게 느긋한 자세가 필요할 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만한 때가 따로 있지요. 지금은 그럴 때가 지났습니다. 늘 깨어 경성해야 하기 때문이죠.

지금, 이 열 처녀들은 다 함께 정신 차려 미리 준비하고 기름을 갖춰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마냥 한가롭게 있기만 해선 안 될 때였습니다.


다섯 처녀만 각각 갖췄고, 나머지 다섯 처녀는 미처 갖추지 못했던 이 등유 곧 올리브 기름은 흔히 전통적 풍유 해석에서 성령으로 풀이되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등잔에 기름이 가득하듯 늘 성령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좋은 뜻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 처녀 비유에서, 주님의 강조점은 그 무엇보다 바로 종말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마냥 느긋한 자세는 미련함이고, 미리 준비하는 것은 슬기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물론 바로 다시 오실 주님, 곧 재림하실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단, 이 열 처녀들은 들러리 역할이지 '신부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부다처 개념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에 예언된 어린양과 새 예루살렘의 혼인 잔치는 솔로몬 왕과 같은 일부다처적 개념이 아닙니다.

오늘날 소위 '신사도운동', 미국의 '중보운동', 과거의 캔서스시티예언그룹(KCF) 출신자들과 특히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한국의 신사도운동권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마치 각 신자가 예수님의 신부인 것 같은 의식과 착각을 열심히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은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미묘한 뉴에이지 형 교회음악과 함께 '교회의 여성화'를 가져오는 한 동인(動因)이 돼 왔다고 할 수 없지 않지요.
 
그래서 우스운 얘기로, 남성 신자들에게는 "내가 주님의 '신부'라면, 미리 성전환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나?"라는 막연하고 황당한 잠재적 압박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남자 교인들이 점점 '여성화' 돼 가는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 그래서 주로 '마초맨'들-스스로 남성답다고 자임하는 남성과 그 가족들을 위한 '카우보이 교회' 따위를 세우는 현상과도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열 처녀 비유와 우리 각 신자가 주님의 '신부'라는 교계 일각 특히 신사도운동권의 주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아무튼 갑자기 들이닥치는 신랑은 재림하실 크리스토님을 상징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 그런데 온다던 신랑이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나타나지를 않으니,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지치고 견디다 못한 열 처녀들은 모두 끄덕끄덕 졸거나 아예 콜콜 코를 골기 시작합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 곁을 지키다 잠들어 버린 세 제자들처럼...


그때였습니다.

"보세요, 신랑이오! 다들 맞으러 나와요!"

바깥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리자, 열 처녀들은 꿈인가 생시인지 꿈결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갈피를 못 잡으며 부스스 잠을 깹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정신을 번쩍 차려 재빨리 자기 등과 기름을 챙깁니다. "얘들아, 신랑이 오셨단다. 어서 일어나서 맞으러 나가자!"

미련한 다섯들도 곤히 든 단잠을 깨어 허둥지둥 자기네 불을 챙기려다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머, 어머...불이 다 꺼져 가네! 아이, 어떡해? 등잔 안이 텅 비었어. 기름이 한 방울도 없네!" 그리곤 자연히 슬기로운 다섯에게 눈길이 돌아갑니다. "얘, 자기야. 우리 기름 좀 빌려 줘, 응? 지금 급하니까 사이좋게 나눠 쓰자. 착하지, 얘." 하고 한 처녀가 슬기로운 한 명에게 다가갑니다. 다른 넷도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얘? 좀 도와 줘."

그러자 슬기로운 다섯이 말합니다. "음, 그러곤 싶은데 말야. 만약 너희 하고 나눠 쓰다간 우리 모두 다 잔치 도중에 꺼지고 말 거야. 등이 열씩이나 다 꺼져 봐. 신랑 신부랑 손님이랑 뭐가 되겠니... 이 중대사에 말야, 그러지 말고 얘들아, 지금이라도 바깥 상가에 나가서 기름을 좀 사 갖고 돌아와. 늦게까지 여니까 아직 문을 안 닫았을 거야. 응?" "그래, 그렇게 해."

슬기로운 다섯이 동시에 권하자, 미련한 다섯은 마지 못해 투덜투덜 문밖으로 나서서 길거리 가게로 걸어갑니다. "에고, 기집애들. 치사하게, 그 많은 기름그릇에서 조금씩 빌려 주면 어때서? 이제 보니, 깍쟁이들이야!"

다행히도 밤늦게까지 아직도 열린 가게를 보자,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냉큼 기름을 사서 각각 등잔에다 채운 다섯은 "자, 이젠 우리도 기름을 채웠겠다...우리나 쟤네나 뭔 차이가 있어? 어서 가서 신랑을 맞자!" "그래, 제깟 것들이 잘 나 봤자 뭘 그리 대수야!" 하며 서둘러 혼가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부랴부랴 잔치집으로 와 보니...이상하게도 조용합니다. 슬기로운 다섯이 등불을 들고 나와 신랑을 맞이하고 집 안팎에서 반가와 법석일 텐데, 모두들 안으로 들어갔는지 인기척도 없습니다.

다섯은 대문을 두드립니다.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데, 안에서는 선뜻 대답이 없습니다. "...?..." 교대로 또 두드리는데, 여전히 무응답입니다.

마침내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이젠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을 찾습니다.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저희 나머지 다섯이 왔어요!" 하고 거의 울쌍을 짓다시피 합니다. 원망이 섞인 볼멘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한 남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참으로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는데, 나는 그대들을 모르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그 선언은 신랑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다섯 처녀들은 잠시 망연자실해 있다가 사태를 알아차리자, 바깥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다 지쳐서 흐느낍니다. 일부는 안 쪽을 원망하며 이를 부드득 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모든 게 끝난 상황이어서, 아무 소용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곤 "그러니 너희들도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니까."라고 하십니다.

다섯은 미련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미리 깨어 있었다면 불이 꺼져가는 것을 보고 미리 기름을 살 수 있었을 터입니다.

주님은 열 처녀가 모두 다 온전히 천국을 이루길 바라시지만 미리 깨어 준비하지 못하여 천국 혼인 잔치에서 탈락할 사람들이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슬픈 탈락에 끼지 맙시다.
슬기로운 다섯처럼 미리 준비하고 깨어 있읍시다. 
그래서 신랑의 복된 잔치자리에 빠짐 없이 함께 참여합시다!


(추가) 이상을 간추려 보면, 천국 혼인잔치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은: 

1. 순결한 영적 처녀여야 한다. 

2. 혼례식장을 밝히기에 충분한 조명, 즉 열 개의 등잔(횃불)+기름(성령충만)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때문에 나머지 다섯만 밝혀야 했다. 즉 교회 가운데는 마지막 날 예비되지 못해 버림 당할 '슬픈 절반'이 될 운명의 회중이 있다. 나머지 절반만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  

3. 깨어 있어야 한다. 또 참고(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언제라도 신랑을 맞을 수 있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과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남을 챙겨주다 자신은 못 챙기는 불행은 결코 없어야 한다! 

4. 신랑이신 주님께서 드디어 나타나실 때, 즉 대천사(=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 모든 것이 준비된 태세로 즉시 나가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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